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 개발이 한창인 망객산 전경
“망객산은 신평면의 진산으로 「손바라기산」, 객망산(客望山)으로도 불렸다. 이 산에는 김복선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신평면 금천리 시장(면소재지)에서 삽교천 가는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2Km정도가면 높이 68m의 망객산(望客山)이 있다. 이 산은 신평면의 진산(鎭山)으로 현재는 이 일대의 뽕나무밭 조성지에 죽어간 누에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잠영비(蠶靈碑)가 하나 서있다.

그 주위는 소나무 울창한 숲으로 산록 밑으로 남산리, 신흥리, 도성리, 금천리와 통하는 사거리가 있고 서낭당이 2곳 있었다.

김복선 바위

김복선(金福善)은 조선 선조 때의 기인으로 풍수지리에 밝았으며 천민출신이라 빛을 보지 못하고 이곳에 와서 숨어 살았다. 지금도 망객산에는 「김복선 바위」라 해서 그가 숨어 살 때 앉았던 커다란 바위가 하나 남아있다. 옛날 김복선은 종이었지만, 사람 됨됨이가 출중해서 앞일을 훤히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알아 지체 높고 글도 잘 하는 이율곡 선생이 찾아와서 임진왜란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느냐고 의논할 것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석학 율곡 이이와 토정 이지함이 그의 숨은 재주와 학식을 알고 이곳으로 찾아와 일을 상의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이들이 앞으로 있을 임진왜란을 크게 걱정하니 김복선이 토정과 율곡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인신년상사(寅申年喪事)에 임진년(壬辰年)을 걱정 하십니까 하며 서로 한탄했다.

이렇게 김복선이는 율곡 선생이나 토정을 잘 맞이하려고 동네 앞산에 날마다 올라가서 가끔 바라다 봤는데, 김복선이 이 산에 올라가서 그들(손님)이 돌아가는 것을 멀리 바라보았으므로 「손바라기산」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한자표기로 객망산(客望山) 혹은 망객산(望客山)이라고 불렀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왜장 청정이란 놈이 거지 모양을 하고서 우리나라에 몰래 들어와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염탐했는데, 이놈이 이 당진골에 들어와서 염탐을 했다.


그 때 김복선이는 아이들을 시켜서 왜장 청정이 저기 간다, 왜장 청정 저기 간다고 외치게 했다. 왜장 청정은 이 소리를 듣고 그만 혼줄이 나서 도망가 버렸단 말도 있다. 김복선은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앞일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어도 늘 천대만 받고 살아서 그런지 도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지기능력을 자랑하지도 않고 오로지 천민으로 망객산에 숨어 살면서 세상을 조롱이나 하듯 온갖 기행을 일삼으면서 살았다.


그가 한국 당대의 석학인 율곡과 기인 토정을 만나서도 조금도 구김살 없이 당당하게 자기의 뜻을 말던 김복선에 관한 기록이 없어 아쉬운 감이 있다.
아마도 그는 실존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 김복선 바위
서낭당

또한 신평면 신흥리에서 망객산으로 가는 도중에 서낭당이 2곳 있었다. 현재 신진리스 공장 주변과 안양절터 가는 그 산마루 지점인 금천리를 넘는 고개에 있었으나 이젠 흔적도 없다.

이 서낭당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이율곡 선생이 김복선을 만나려고 도고봉에 3번을 내려 왔다는 이야기로 이 고장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백정은 3일 평정을 하고 김복선이는 3달 평정을 하며 이순신은 8년 풍진을 평정한다.”는데 김복선이 말하길
“저는 상민으로 태어났기에 그런 일을 못하니 이순신을 찾아 가 보시오.”


하였다. 그 당시 이순신은 8살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복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서낭 음식이나 얻어먹으라고 묻고 김복선이 어머니를 묻고 서낭당을 만들어 놓고 갔다고 한다.


그 돌이 수십 차나 되어 사람의 서 너 키 정도 쌓여 있었으나 일제 치하 말엽 천주교인들이 실어다 집을 짓는 데나 길에 깔아 유림 측과 마찰이 일으키기도 하였다.


경상도 상주에서는 이복선 장군으로 전하고 있으며 그 유명한 망객산을 못가보고 죽는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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