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실버요양센터 ‘편 종 만’센터장

▲ 편종만 센터장이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가족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건물 사이로 편종만(61·신평) 센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을 헤매고 있는 기자를 위해 건물 밖까지 마중나온 것이다. 건물 위로 작게나마 ‘행복한실버요양센터’라 적혀있다.


바로 그 곳이 그가 마음을 펼치고 있는 아름다운 터전이다. 지난 10월 노인장기요양기관을 설립하고, 요양보호사인 아내(59·백인숙)와 함께 일상생활이 어려운 어르신을 섬기고 있다.
그는 어르신께 대한 자신의 봉사를 돌봄이 아닌 ‘섬김’이라 말한다.


몇 달 전, 병상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님에 대한 아쉬움과 죄스러움으로, 어르신들께 정성을 다하는 보살핌과 함께 든든한 말벗이 되어드리고 있어 잔잔한 행복을 전해주고 있다.
손하경 기자 sarang418@hanmail.net


▲ 성심껏 모시며 든든한 말벗이 되어 어르신께 흐뭇함을 주고 있다.
돌봄이 아닌 ‘섬김’의 마음으로

온정의 손길이 더욱 그리워지는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특히 불편한 몸으로 소외되고 외로운 어르신께는 쓸쓸함으로 다가오는 계절이기도 하다.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등으로 인해 노인부양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따른 개선책으로 지난 7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마련되었으나, 시행 초부터 제도를 둘러싼 재정적인 문제점 등으로 수급자에게 환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복지정보센터에 의하면 기존의 노인복지서비스체계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수급자의 종합적인 욕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해 나감으로써, 권리성과 선택성이 강화되는 수급자 중심의 서비스로 변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편 센터장은 노인재가요양기관을 설립하기에 앞서, 시설운영에 따르게 될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예상한 듯 보였다.
재정부족에 따른 전문인력부족 등의 열악한 시설환경을 뒤로한 채, 그럼에도 노인요양기관을 설립한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었다.


현재 그의 아내를 포함하여 13명의 요양보호사가 22명의 어르신께 수호천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에 따라 응급처치는 물론 든든한 말벗도 되어드리고 있어 훈훈함을 더하고 있다.


“지난 10월에 설립하여 치매·중풍과 같은 노인성 질환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어르신댁에 직접 방문하여 돌보고 있습니다. 열악한 시설 탓에 어르신을 시설 내에 모실 수 있는 요건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세 분의 어르신을 섬기기 시작하여 현재는 22분이 계십니다.

요양보호사가 매일 방문하여 재활치료를 비롯한 식사준비, 목욕, 세탁, 외출 등을 돕고 있지요. 어르신 중에는 정말 안타까운 분이 많습니다. 홀로 외롭게 계신 분이 대부분인데, 육체적인 고통을 떠나 정신적인 고통이 더욱 크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 분들께 자식을 대신해 말벗도 되어드리면서, 정말 필요한 사람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듯 불편하신 어르신을 볼 때마다 2년간 병상에 계셨던 부모님 생각이 더욱 납니다. 평소 건강하셨지만 노환이 겹치면서 많이 편찮으셨지요.

그것도 아버님, 어머님 두 분이 올해 초 한 달 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작 아들로서 해드린 것이 없어 늘 아쉬움으로 죄스러울 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방법을 몰랐고, 어떤 것이 최선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좀 더 관심을 쏟고 돌봐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나마 부모님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어르신을 섬기게 된 것을 좋은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 어르신께 드릴 과일바구니를 정성스레 준비하고 있다.
작은 보탬으로 받는 ‘가치 있는 삶’

그는 기관설립 이전부터 45년간의 긴 신앙생활을 계기로 봉사활동과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이 더욱 남다른 것으로 보였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 시절 고아원을 시작으로, 소년교도소의 교정목사로 있었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를 회상했다.


“가난한 농업인의 아들로 태어나 그 무엇보다 배고픈 서러움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그런 열악한 가정형편을 배경으로 제 나름대로의 실망감으로 일상에서 탈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교시절부터 신앙생활을 갖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천안의 삼일육아원(고아원)과 소년교도소에서 아이들을 지도해 왔습니다.

저의 작은 가르침으로 인해 아이들이 올바른 사고로 성장해 나간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었지요. 제가 부모의 입장이 되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부모님의 훌륭하신 가르침의 바탕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정말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이셨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논밭을 둘러보시며, 하나라도 더 결실을 얻고자 애를 쓰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모님의 사랑도 충분히 받으며 자라왔고,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무언가를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빚을 진 것입니다. 이제 환갑을 넘긴 나이로 갚을 일만 남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를 아내와 함께 뜻을 맞추며 의미 있게 살고 싶습니다”


현재 충남장애인협회 이사, 요양기관센터장으로 있으면서 그 어느 것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어 보였다.
봉사에 대한 그의 열기는 여느 젊은이 보다 더 뜨겁게 넘쳐나고 있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 ‘최선을 다해라’. 저희집 가훈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아들녀석 둘에게 자립심을 키워주고 싶었습니다. 아들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고 뿌듯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6년간 생계를 맡아왔던 아내의 역할이 컸습니다.

결혼 후 월남전에 참전하고 뒤늦게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생활이 어려웠던 시절, 양장기술이 있었던 아내는 옷을 수선하며 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습니다. 그 점이 늘 고마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20여 년간의 성직자로 있으면서 그 틈틈이 해외봉사를 다니며, 그 것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소박한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중앙아시아쪽 난민촌에 복지기관을 설립하여,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적은 돈으로도 그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은 보탬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그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삶도 없다고 봅니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