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케네디 암살 50주년, 케네디의 재평가
[NIE] 케네디 암살 50주년, 케네디의 재평가
  • 최효진 기자
  • 승인 2013.11.20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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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E] 케네디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 것이지 묻지 말고, 우리 모두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1961. 1. 20 대통령 취임연설 중 한 대목.

지난 22일은 미국의 제 44대(35번째)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 50주년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22일 텍사스주 댈러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 도중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쏜 총알에 절명했다. 현장에는 부인인 재클리 여사가 같이 하고 있었다. 그녀의 품에 쓰러진 케네디 대통령은 46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재임기간은 1960년 1월 20일부터 1963년 11월 22일로 체 3년이 되지 않았지만, 미국인들은 링컨, 루즈벨트, 워싱턴 등과 함께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이나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만든 루즈벨트와는 다르게 케네디의 성과는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이 많지 않다. 다만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대통령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올해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50주년을 맞이해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가 대단하다. 각 언론들은 그의 생애와 암살, 그리고 재평가까지 끊임없이 기사와 방송 다큐멘터리들을 쏟아내고 있다. 추모일을 이틀 앞둔 20일에는 특별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셸 여사가 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은 헌화하면서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케네디 전 대통령의 용기 있는 행동과 그의 업적을 기렸다. 일각에서는 최근 지지율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는 오바마 대통령이 '케네디 이미지'를 활용해 권위회복을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하고 있다.

재임기간의 케네디
케네디는 의회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예로 들면 미국 역사상 시민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연방법으로 불리는 포괄적인 민권법안은 케네디가 암살 당하고 난 후인 1064년 7월에 가서야 통과되었다. 케네디를 이은 부통령 출신 린든 존슨은 이 법안을 통과시켜 케네디를 추모하자고 호소해야했다. 또한 1963년 여성들의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지위를 진단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여성지위자문위원회’를 통해 실현시키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1963년 ‘동등임금법’을 통과시켰다. 또한 민권법에도 상당부분 반영되었다. 복지분야에서도 노인의료보험제도 도입과 실시를 의회에 강력히 권고하면서 정부에 ‘사회보장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것도 케네디 정부 시절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고, 린든 존슨 정부에 들어와 ’메디케어(노인의료보험제도)‘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호제도)‘를 포함한 사회보장법 개정안이 1965년도에 가서야 통과되었다. 또한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봉사자들을 훈련시키고 파견하는 단체인 ’평화봉사단‘을 창설한 것도 케네디의 업적 중 하나이다. 또한 중남미 20여개 국가들과 ’진보를 위한 동맹‘도 추진했다. 미국이 경제원조와 민간투자를 시행하고 중남미 각국이 경제 및 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 계획은 쿠바혁명의 영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케네디 대통령의 사회약자와 세계 정의를 위해 노력은 훌륭한 업적이다. 비록 그것이 그의 사전(死前)이 아닌 사후(死後)에 주로 통과된 법안으로 제도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가시적 업적과는 또 다른 부분에서 평가 받고 것은 위기관리 능력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이 빛을 발한 사건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이 사건은 1962년 10월에 약 13일간 위기가 진행되었다. 그 중 가장 발화점이 증폭된 날은 16일이었다. 미국의 정찰기 하나가 쿠바 상공에서 소련 본토에서 건설한 핵미사일기지와 똑같은 미사일기지 건설장면을 촬영한다. 이 사건은 충분히 핵전쟁으로 갈 만한 일이었다. 이 사건이 끝나고 케네디는 “핵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1/3에서 1/2 사이였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인류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구체적으로 체감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국가가 위기를 관리하는 의사결정의 전형을 창출한 계기도 되었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 내에서는 매파와 비둘기파로 양분된 관료들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이 쿠바 위기를 해결하게 된다. 이 과정은 현대 위기 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교과서가 된 사건이다. 이에 대한 수많은 연구물들이 나와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한 이후에 미국과 소련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 핵무기 실험 금지 협정의 추진하게 된 직접적 이유가 된다. 당시 미국은 소위 ‘공포의 핵균형’이라는 정책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핵무기 억제력이 소련과의 전쟁을 막아냈다’는 것이 당시 주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케네디 형제는 다르게 생각했다. 오히려 핵전쟁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고, 당시 매파에서 비둘기파로 바뀐 맥나마난 국방장관의 지휘가 아니었다면 미군과 소련 핵잠수함의 충돌을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1년 전 피그스만 사건(1961년 4월 17일 약 1천 500여명의 반카스트로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를 침공했다가 실패한 사건. 미CIA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졌고, 전 정권에서 계획되었고 CIA가 잘못된 정보를 보고했다고는 하지만 이 사건으로 쿠바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서갈등도 고조된다. 이것은 쿠바위기의 빌미 중 하나가 됐다고 평가된다) 당시 관료들의 거짓말에 케네디가 질려 버렸다. 관료들이 회의 때와 다른 이야기를 언론에 나가서 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쿠바 위기 당시에 케네디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 때 관료들 모르게 비밀리에 녹음을 한다. 이 회의에는 국방장관, CIA, 안보비서관, 국무장관, 합참의장 등 안보관련 거의 모든 주체가  참여한 회의였다. 이 자리에서 당시 위기 상황의 이렇게 해서 관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치열하게 논쟁하고 싸웠던 기록이 자세하게 남게 된다. 결론적으로 쿠바 위기는 전면적인 핵전쟁으로 가는 참사를 막고, 역으로 핵감축으로 이어지는 초석을 닦게 된다. 1인의 결정이 아닌 집단 시스템을 통한 ‘위기관리’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국내 정치와 정책 결정 과정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과정은 영화 D-13’에 생생하게 남게 된다.

케네디와 케네디家 그리고 부모(父母)
케네디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가문을 빼 놓을 수는 없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보스턴 시장과 의원을 지낸 존 F. 피츠제럴드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금융, 부동산, 영화산업, 주류 산업등으로 돈을 벌었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주재 미대사를 엮임한다. 케네디의 9남매는 두명이 암살당했고, 장래가 촉망 받던 큰 아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으며, 딸들 중 하나는 비행기 사고, 하나는 정신 지체와 뇌수술 실패로 수용시설에서 생을 마감한다.
정치인으로 대성한 존F 케네디, 로버트F. 케네디 그리고 에드워드M. 케네디 모두가 하버드대를 졸업했다는 점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대기근의 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한 아일랜드 인들 가운데 자수성가하여 막대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한 집안이, 자녀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게 하여 마침내 미국 주류 사회의 최고 리더로 만든 셈이다. 반면 이들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부를 쌓은 과정이 떳떳하지 못했던 것을 꼬집는 시각도 있다. 조지프 케네디는 미국에 금주법(1020~1933)이 시행되고 있을 때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주류를 밀반입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금주법이 폐지된 뒤 그의 수입회사는 주류 수입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나중에 회사 주식을 매각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이 수익을 바탕으로 그는 미국 내 주요 사무용 건물을 사들여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케네디가 형제들이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갖게 된 것은 집안 식탁에서부터 길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로즈는 자식들에게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신문, 잡지에서 토론 주제가 될 만한 중요한 기사를 읽게 하고 식사시간을 토론의 장으로 이끌었다.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에 토론의 기술을 물론이거니와, 상대 의견을 경청하고 자기 의견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 정치의 기분을 몸에 익힌 셈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만난 유명인사들이나 사업에 과한 이야기도 식탁의 단골 메뉴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자녀들은 넓은 세상에 관한, 아니 미국을 이끌어 가는 주류 사회와 리더십에 관한 식견을 키울 수 있었다. 사실 앞서 언급한대로 존F.케네디보다는 형 조지프와 동생 로버트가 집안의 기대를 모았다. 이에 비해 존은 말썽도 제법 피웠고, 공부에 전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존이 청소년 시절 말썽을 피웠을 때 아버지는 이런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전했다. “잔소리꾼이 되기 싫다. 너의 재능은 탁월해. 판단이 정확하고 이해력 깊은 사람이 되어 주기를!” 존이 하버드를 졸업할 때에는 아버지는 다시 축전을 보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가 누구보다 지혜롭다는 것, 그리고 나의 멋진 아들이라는 것. 졸업 축하한다” 이렇듯 아낌없는 물적 뒷받침과 함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보내고 자부심과 자신감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케네디에 대한 재평가
하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소 냉정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1일(현지시간) "요즘 학생들이 배우는 케네디는 그들의 조부가 배운 케네디가 아니다"며 지난 50년간 교과서에 기술된 케네디 평가의 변화를 추적했다. 사망 5년 뒤인 68년 고교 교과서는 케네디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그리면서도 그를 젊고 모험적이며 미국의 진보적 이상을 부활시킨 지도자로 기술했다. 이런 격찬은 한동안 이어지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시들해졌다. 평가가 뒤바뀐 대표적 예가 쿠바 미사일 위기와 관련한 것이다. 68년 교과서가 케네디의 강인함과 자제력, 힘의 사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의 결과로, 75년 교과서가 진정한 정치인 케네디의 본성이 완벽하게 드러난 경우로 이 사건을 각각 기술한 것과 달리 83년 교과서는 케네디의 승리가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강경세력에 의해 축출됐다는 점에서 공허하다고, 98년 교과서는 핵전쟁 위기를 부추긴 케네디를 영웅 취급한 것이 성급했다고 각각 수정했다. 2009년 교과서는 심지어 미국 코 앞에 공산 정부(쿠바)를 유지시키고 소련의 장기 군비 확장을 자극한 굴욕적 사건으로 격하했다. 베트남전과 관련한 평가도 변하고 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베트남전에 가망이 없자 케네디가 미군 철수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비밀 해제된 자료는 그가 베트남전을 확대시킨 '냉전의 전사'라고 폭로했다. 그가 민권운동에 관심이 많은 이상주의적 정치인이 아니라 차가운 현실 정치인이었던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평가가 바뀐 것은 80년대 이전 역사 기술이 성공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후에는 미국에게도 잘못이 있고 영웅도 결점이 있다는 수정주의로 돌아선 것이 한 이유다. 케네디가 사망할 당시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다섯살 미만이었던 미국인이 전체 인구의 4분의 3이나 된다는 점도 한 요인이다. 갤럽 조사에서 케네디는 88년부터 2000년까지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1위로 꼽혔으나 최근에는 로널드 레이건, 에이브러햄 링컨, 빌 클린턴에 이어 4위에 밀려났다. 이마저도 43~64세 장년층의 지지율 덕분이다. 그렇다면 케네디는 위대한 대통령일까. NYT 편집장 질 에이브럼슨은 "그는 거의 설명이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모호한 말로 이 질문에 답했다. WP의 칼럼니스트 로버트 사무엘슨은 "케네디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했다. 미국인에게 케네디 재임 기간은 아더왕이 통치한 캐멀롯에 비유되는 정의와 행복이 넘치는 동경의 시대였다. 하지만 케네디가 업적보다 과장된 수사로 포장된 결점 많은 지도자인 것으로 재평가되면서 그는 보통사람으로, 그의 인기는 이미지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