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칼럼■

  첫눈이 내린다. 금년에 처음 내리는 눈이다.
  첫눈치고는 제법 많이 내리고 있다. 하늘을 떠나온 함박눈이 지상에 내려앉을 곳을 찾기나 하는 듯 아기 주먹만 한 눈망울을 굴리며 제멋대로 윤무하고 있다.
 대개 첫눈은 오는 듯 마는 듯 잠시 휘날리다 그쳐버린다. 아이들이 장난질하듯 곧잘 그렇게 하지만 어느 때는 첫눈답지 않게 느닷없는 폭설을 퍼부어주기도 한다.
 가을이 다 가버린 겨울 초입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서리를 밟고 걷는 길도 눈이 내려야 비로소 겨울기운을 맛보게 된다. 눈이 내리기 전에는 추위에 목이 아무리 움츠려들어도 겨울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첫눈이 내리고서야 ‘아, 겨울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다.
 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 보았는가. 한밤중 몰래 내려 쌓이는 눈 소리에 잠을 깨어 일어난 적이 있는가. 아무도 그런 적 없다고는 못한다. 누구나 한 번은 아니 그 이상 몇 배도 더 이미 눈 쌓이는 소리에 잠깨어 일어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문득 소슬한 기운을 느끼고 깨어 일어나 두 손으로 반대편 어깨를 마주 비비며 창문을 열었을 때, 또는 문을 열고 마루에 나섰을 때, 한 걸음 더 마당으로 내려섰을 때 마주해오는 쌓인 눈, 아직도 눈은 내리고 눈은 내리고.....
 금방 푸근한 기운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소슬하고도 푸근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아 돌고 있지 않은가. 눈 쌓이는 소리가 소슬한 기운이 되어 잠자는 우리의 귀를 두드려 깨워서 불러내고는 푸근한 기운을 함께 불어주는 것이다. 눈 쌓이는 소리는 그렇게 듣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다 듣고 있는 눈 쌓이는 소리를, 제 깐에는 행여 들릴세라 조심하며 소복소복 쌓아가는, 그 첫눈이 쌓이는 소리만 듣고서도 우리는 행복에 젖을 수가 있었다. 그때는 왜 그 많던 욕심도, 욕구도, 욕망도, 집념도 다 한 순간에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죄 달아나 버리고 말던 것이었던지.
 그리고 이 세상 그 무엇도 또 다른 어떤 것도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 순이 얼굴은 또 왜 그렇게 보름달보다도 훨씬 큰 모양으로 떠있던 것이었는지. 또 손발은 물론 온 몸의 힘이란 힘은 왜 모조리 빠져나가버리고 두 다리로 버텨 서 있기도 버거웠던 것인지.
 첫눈이 어떻게 이런 순화기능을 가질 수 있는가. 첫눈은 친화 융화 용해기능 까지를 합하여 다 가진 듯하다. 첫눈의 감회는 사람마다 각각 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 감정의 폭이 대동소이하다고 보여 주머니를 조금만 더 넓게 벌리면 다 함께 담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첫눈의 위력은 아무래도 그 처음이라는 첫 자에서 비롯되나보다. 첫 자는 순수와 함께 여린 떨림을 담고 있지 않은가.
 첫사랑의 순수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첫사랑에 빠진 이, 첫사랑을 하는 이들의 영혼은 지극히 맑고 그윽할 것이다. 첫사랑을 흔히 풋사랑이라고도 한다. 덜 여문 사랑이란 뜻이다. 그것보다는 미숙한 사랑이라고 하는 게 좀 더 가깝지 않겠는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랑을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여 고민 고민하며 서툴게 만들어 하는 첫사랑은 그래서 애틋하기까지 하다.
 첫 키스는 어떤가, 그 황홀함이. 첫날밤은 어떨 것 같은가, 그 설렘이. 첫 울음, 그 우렁찬 고고성은 자축의 의미일까. 첫 대면, 엄마와 아기의 첫 대면, 그 천륜의 숙명에 숙연함을. 첫술은 어떤가, 첫술에 배부를 수야 없지만 첫술이 있어야 시작이 되는 것. 첫 단추,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할 터. 첫 출근, 그 두근거림은. 첫잔은 어떤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일. 첫 골, 한 없이 터뜨릴 무한한 가능성의 세레머니라도.
 첫발자국은 어떤가. 눈 오는 벌판, 눈 쌓인 벌판에 나서보라. 지구 끝까지라도 뻗어갈 듯 펼쳐진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순백 위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선뜻 앞장 서 나가기란 쉽지가 않다. 용기를 가져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걸맞지 않다고 비난을 살까 금세 두려워진다. 그러나 다행히 앞장 설 누군가는 꼭 있다. 참으로 순수하며 용기도 겸비한 자가 꼭 있기 마련인 것이다. 첫발자국이 어려울 뿐 길은 금방 생겨난다.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발자국을 남기며 떠나고 나도 나에게는 첫발자국인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
 첫눈하면 순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첫눈 내리는 날 순이는 거기에 있었다.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첫눈이 오면 그렇게 순이는 그곳에서 고이는 세월을 퍼내고 있다. 그 소중했던 날들이 새로이 덮쳐오는 세월에 짓눌리고 덮여버릴까 봐. 그래서 다시는 그날을 되돌아 볼 수도 없게 될까 봐. 고이는 세월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첫눈을 맞으며 옛 추억을 더듬노라면, 그 현란한 군무(群舞)의 춤사위 자락마다에 포개지고 싸여져 있던 수많은 얼굴들이 뛰쳐나와 함께 춤을 춘다. 그 속에 가장 밝고 또렷하게 떠오르는 얼굴, 순이 얼굴이 있다. 그런데 한 순간 춤사위가 되돌아 치고 보니 순이 얼굴은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에 있는 것, 그건 내 얼굴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겐 순이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것인가.
아니다. 휘몰아지는 춤사위에 섞여 돌아가고 있는 얼굴 얼굴들, 아! 모두가 우리의 순이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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