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강정의  

칼럼니스트 강정의 ⓒ당진신문
칼럼니스트 강정의 ⓒ당진신문

깨달음에 대한 어느 노(老)스승과 제자들의 문답

이 글은 칼럼니스트이며 ‘허허 참 속으며 사는줄 모른다’의 저자인 강정의 법사가 본지에 보내온 새 봄을 맞아 깨달음에 대한 쉬우면서도 진솔하게 쓴 생활철학의 글이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통해 희망을 갖게 하고 평범한 글속에 은유와 해학이 담긴 여운이 있는 글이라 생각되어 게재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해보면 참 안타깝고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게 특히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세 사람의 제자 중에 한 제자가 먼저 말했다


“예! 스승님. 지금 우리 사회를 잘 살펴보면 경제적사정이 어렵고 몸이 불편해서 고생을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스승이 말했다. 


“그래 잘 보았구나. 특히 요즈음 코로나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우리사회에 그런 분들이 많이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고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분들이다”


두 번째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저는 예전에는 모르고 지냈는데요. 요즈음 나이를 먹고 보니 제가 아내에게 그동안 잘못하고 지내 와서 그런지 아내의 주름진 얼굴과 거칠어진 손을 보면서 집사람이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지난 날을 반성하며 아내에게 잘 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루 세끼 식사준비는 물론이고 집안 청소며, 세탁하는 일은 이제 제가 다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집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면 집안이 편하다는 것도 이제와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장해서 출가한 자식들이 저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아주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왜 진작에 이런 생각을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런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스승이 답했다


“허 허.  그간 그대가 부인에게 지어온 업(業)을 값는 것 같구나. 요즈음 그렇게 사는 이들이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늦게라도 그런 생각으로 사는 것, 참 잘 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제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가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가?”


스승의 말을 듣고 난 제자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승에게 세 번 큰절을 하고 나서  말했다.


“스승님  바로 저입니다. 제가 바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나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어리석음의 감옥 속에 갇혀 살아왔습니다. 허망하고 한때인 나를 진짜 나 인줄알고 속으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누구인데라는 아만심(我慢心)을 내며 사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고, 그게 바로 나라는 것도 이제 와서 알았습니다. 요즈음 보면 소위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도 저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자기는 잘났다고 생각하더라도 남들이 보기에는 거만스럽고 뻔뻔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순간순간 변하고 바뀌는 진리의 모습들이라 배웠습니다.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찰라 찰라 변하는 나이기에 나없는 나인 무아(無我)가 참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나는 변하는 나이지 고정된 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렸을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해보고 어떤 것이 참 나인가를 생각해보라는 공부도 하였습니다. 참 모습인 실상(實相)이란 모습이 없는 모습 즉 변하는 모습인 무상(無相)이라는 말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나라는 것이 무아에서 생각하는 공(空)사상이 그런 의미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공은 중국에서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로 표현했지만 공(空)과 무(無)의 의미는 아주 다르다는 것도 공부했습니다. 무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면, 공은 없는 것이 아니고 변하기 때문에 텅 빈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는 연기법의 철학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스승님이 하신 말씀도 이제서야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이치를 모르고 살아온 불쌍한 사람입니다. 스승님께서 가끔 법문을 하신 말씀중에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깨달으면   눈이 혜안으로 바뀌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연기법(緣起法)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나가 없는 나를 깨닫고 보니 걸림이 없는 대 자유를 느낄수가 있습니다"

"욕심과 집착과 나라는 생각이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인줄 모르고 어리석게 살아왔습니다. 제가 깨닫지 못하고 살아온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승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늘 욕심으로 살려는 중생길  마음의 브레이크를 점검하며 살겠습니다. 깨닫고서야 제가 지난날 불쌍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저의 삶의 길이 보입니다. 진훍에 더렵히지않는 연꽃처럼 살아가겠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한때라는 진리를 화두로 삼고 살겠습니다. 스승님 정말 고맙습니다"


세번째 제자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듣고있던 스승이 말을 하였다.


“허 허, 그대들 말 잘 들었다. 그렇게들 생각하는구나. 말과 글에는 다 무게가 있다. 깨달은 사람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현상이 사라진 후의 모습 즉 변한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란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늘 변화를 염두에 두고 말을 하고 글을 쓴다. 그게 무게가 있는 말과 글이다. 그대들은 다 근기(根機)대로 한 소식들을 했다. 첫째 제자는 나의 피부(皮)를 얻었다. 둘째는 나의 살(肉)을 얻었다. 셋째는 나의 골수(骨髓)를 전수 받았구나. 


‘아이고 무슨 말씀이신가?’ 스승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를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이어 스승은 말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똑 같이 법(法)을 전했는데, 너희들은 각자가 다르게 나의 법을 피육골수(皮肉骨髓)로 받아들였구나. 깨달으신 분이 인도 니련선하 강가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으신 깨달음을 위없는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 아뇩다라삼약삼보리)이라고 한다. 그 분의 깨달음은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고 변하기에 괴로움인 고(苦)가 발생한다는 것을  깨달으셨다. 모든 것은 덧없음을 깨달았기에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살아가라고 제자들에게 부촉(附囑)하셨다”


스승은 이어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모든 것은 다 변한다. 다 한때다 덧없다. 늘 그런 화두를 들고 살아가라. 그게 자연의 여여한 법이요, 이치요, 진리다. 봄은 누가 오라고해서 오는 게 아니요, 변함 역시 누가 변하라고 해서 변하는게 아니다. 시간이라는게 바로 변함이요. 변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무한한 힘이다. 변하는 것들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면서 늘 그러려니 하는 생각을 화두로 들고 살아가도록 하여라. 그런 생각을 하면 바로 지혜가 나타날 것이다. 수년전에 티벳트에 갔을때 죽은 사람의 시신을 독수리들에게 던져주는 조장(鳥葬)하는 현장을 본 적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의 한 모습으로 생각하기에 죽음 앞에서 그렇게 슬퍼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며  담담하게 대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늘 모든 것들은 무상하고 덧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변함의 진리를 깨닫고 살게한다는 것은 급변하는 불안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마음 편하게 살아가게 하는데 최고의 정신적인 처방이라고 볼 수가 있다.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다고 스스로 진단을 한다. 번뇌의 삶을 사는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면 좋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의 인생이 덧없음을 알아차리는게 진리를 깨닫는 삶이고 진리를 깨달으면 마음 편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곧 진리와 함께하는 열반(悅槃)의 영원한 세상에서 살수가 있다. 열반이란 불꽃이 다 꺼진 상태 즉 욕망과 집착심이 허망하다는것을 깨닫고 그러한 마음을 다 비운 상태의 마음을 말한다. 열반과 극락은 같은 의미라고 보면 좋다. 열반은 죽어서 가는게 아니다. 죽으면 어디를 간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그런 소리를 희론(戱論)이라고 하는데, 헛된 망상에서 나온 부질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있음이 없음이요, 없음이 있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있음도아니고 또 없음도 아니라는 양쪽을 부정하는 진공(眞空)을 쌍차(雙遮)라고 하며, 있음도 맞고 또 없음도 맞다고 하는 양변을 긍정하는 것을 묘유(妙有)인 쌍조(雙照)라고 한다. 없으면서 있음을 보고 있음에서 없음을 보는게 쌍차쌍조를 보는 깨달은 사람의 중도의 눈이다"

"다 인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는것을 중도적인 생각 또는 중도관(中道觀)이라고 한다. 이 중도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한다. 혹자들은 유교의 중용(中庸)과 불교의 중도(中道)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싑게 말해서 유교의 중용이란 인간의 윤리적인 측면으로 어느 한 쪽에 기울지 않는 공평한 마음이라고 본다면 불교의 중도란 자연을 보는 측면으로 있다, 없다, 길다, 짧다 등 양극단을 떠나 모든 것은 늘 그때 그때  인연에 따라 변한다고 보는 생각이다. 중용이 공평한 마음이라면 중도란 모든 것은 늘 변한다고 보는 진리라고 볼 수가 있다. 중용은 지키는 것이고 중도는 깨닫는 것이다. 모습이 있는 것들은 다 순간 순간 사라지고 새로워 진다. 사라지는 것들에 미련을 갖지 말고, 새로워지는 일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깨침의 경지는 멀어진다"

"변함의 진리를 깨달으면 죽음을 포함한 그 어떠한 것들에도 두려움과 미련을 두지 않는다.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생(生)하고 멸(滅)한다. 인연에 따라 변하는 연기(緣起)법이 곧 생멸의 법이다. 변함을 보는 자는 연기함을 보고 연기함을 보는 자는 자연의 이치를 볼 수가 있으며 자연의 이치를 보는 자는 곧 진리를 보는 사람이다. 변함의 이치인 진리는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좋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세월이 가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좋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세월이 가기에 모든 것들이 새로워지고 아이들이 자라며 사람들은 날마다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낳고 늙고 병들고 죽어감의 생노병사하는 모습들 모두가 진리가 현현(現現:나타내는)하는 모습들이다"

"늙지 않으려면 젊어서 죽어야하고 죽지 않는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수밖에 없다. 변함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변하고 있는 모습을 대할 때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대하며 살아간다. 중국 최고의 정신적 토대가 된 주역(周易)의 핵심사상도 변함의 이치에 두고 있다. 변함에 익숙한 삶이 자연스런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자연의 변함의 이치를 깨닫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사는 사람을 진리와 함께하는 순천자(順天者)라고 한다. 그렇게 살면 마음 편하게  살수가 있다. 여기에서 하늘이란 자연의 변하는 이치인 진리를 뜻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모든 모습이 있는 것들은 다 한때이고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미련을 두지 말고 살아가거라. 마음 편하게 사는 법이 있는데도 그러한 법을 들을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깨닫게 하려고  하지 않는게 좋다. 그게 그 사람이 사는 업이 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은 그러려니하는 생각으로 대하는게 좋다"

"사람은 다 자기 생각인 업(業)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소위 마음이라고 하는 업식(業識)은 분별식으로 주관적인 생각을 말한다. 이 주관적인 분별식을 비우면 본래의 마음인 즉 본성·본래 마음·인식하는 마음만 남는다. 이를 유식학에서 말하는 제9식을 때가 없는 청정한 마음인 무념(無念) 또는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인식하는 그 마음이 바로 무념이요, 무심의 마음이요, 아말라식이라고 한다. 칸트가 생각한 순수이성(純粹理性)이라는 마음도 이 무념 무심과 같은 의미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깨닫게 되면 자기생각인 업이 어리석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깨닫게 되면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잘 산다는 것, 부자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깨달음의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터저 나오는 소리가 있다. ‘아하 ! 지금까지 이런 걸 모르고 살았구나!’  깨닫고 나면 지난날과 같은 삶을 살지 않으려고 한다. 깨달은 사람은 ‘늘 내가 이렇게 사는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며 또 사람들을 볼 때도 ‘저렇게 사는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며 산다. 깨닫지 못했으면서 나는 지금 건강하다, 행복하다,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깨달으면 전혀 딴 사람으로 변한모습을 볼 수가 있다"

"깨달은 사람은 무소유의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한 생활을 수행(修行)이라고 한다. 무소유의 삶이란 아무것도 소유를 하지않고 사는 삶이 아니라 지금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영원한 자기의 소유가 아니고 다 한때의 소유라고 생각을 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지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것들이 진짜 내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사는게 무소유의 참 의미를 깨닫고 사는 사람이다. 나라는 것이 한때인데 무슨 영원한 내것이 있겠는가? 모든 것들이 다 한때인줄을 모르면 욕심을 내고 집착을 하며 산다. 깨달은 사람은 모습이 없는 모습을 보고 말없는 말을 들으며 산다. 진리의 세계는 연기법(然起法)의 세계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는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세계이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形相)이 공(空)이요, 공이 또한 형상이라는 색즉시공 (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이 연기법을 나타낸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기원전 약 1000년전 이스라엘의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그가 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것이 헛되다라고 했는데 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고 사는게 지혜라는 것을 시사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덧 없고 헛 되고 허망한 것이 이상한 일이아니고 지극히 정상인 자연의 법칙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면, 마음 편하게 세상을 살 것이다. 가끔 나는 나훈아의 공 노래를 듣는다. 물론 그가 노래도 잘하지만 그 가사가 진리를 깨닫게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모습이 있는 것들은 꿈같고 헛깨비같고 물거품과 그림자가와 같다는 뜻이다.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을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한다. 선지식만이 어떤 사람을 볼때 깨치고 사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아볼 수가 있다. 늘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  헛되고 헛된 욕망과 집착의 감옥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를 늘 자각하며 살아라"

"그렇게 직접 몸으로 덧없음을 체험하고 집착심을 비워 덧 없는 것들에 매이지 않고 대 자유로 사는 것을 참선수행(懺禪修行)이라고 한다. 어리석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대를 괴롭게하는 것은 그대 마음안에 있다. 욕망과 집착은 괴로움의 씨앗임을 명심하며 늘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며 살아가거라. 얼마 전에 돌아가신 세계적인 명상가인 틱 낫한 스님이 한국에 왔을때 그 분옆에서 함께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행복은 ‘Now here(지금 여기)’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모든 것들이 한때다. 집착하지 말고 살아라.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것이 잘 사는 것이요.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미련없이 잘 죽는 것이다”


한참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 곳 방안에는 스승과 제자들간에 진리의 법을 전하고 받는   즐거움인 법열(法悅)로 가득 차 있었다 탕! 탕! 탕! 노 스승의 주장자 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었다


“어허! 방금 주장자 소리 어디로 갔지?”


‘아 하~ 인생이란 바로 방금들은 주장자 소리와 같은 것이구먼!’ 하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았다. 모두들 다 맑고 환하며 편안한 모습들 이었다. 밖에는 자연의 수많은 봄의 손님들이 변함의 진리를 전하러 오고 있었다. ‘삼라만상님들이 깨달음의 소식을 전하러 오시네. 진리의 옷들을 입으셨네’ 깨달은 이들의 눈과 귀에는 진리를 전하는 소식과 함께 소리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진신문 독자여러분! 이 화창한 새 봄에  깨달음의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