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희 출향인

전봉희 출향인 ⓒ당진신문
전봉희 출향인 ⓒ당진신문

충남 당진시 송악읍 한진리 95ㅡ14는 한진포구다. ‘이지함’이 탄식하며 한이 맺혀 생긴 포구라 한나루 (한진)라 불린다.

1578년 ‘이지함’이 아산 현감 재직 시 하루는 초저녁에 하늘을 올려 보며 천기를 살피던 중 아 큰일 났구나. 개탄한다. 곁에서 수행하는 아전이 사또님 무슨 변괴의 징조가 보입니까? 내일 상오 11부터 하오 1시까지 큰 홍수가 나면 큰 나루터가 생기겠으니 무고한 많은 백성이 피해가 보인다며 지팡일 짚고 현장으로 찾아 나선다

허름한 노인으로 변장한 원님이 집집을 찾아. 내일 午時에 홍수가 생기니 피난 준비를 강구 한다. 아닌 밤중에 대문을 두드리며 떠들자 마을 사람들이 놀란다. 하늘이 말짱한데 무슨 고개를 저으며 투덜댄다. 개중에 피난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밤은 자정이 넘어선다. 순간 소금장수가 지게를 지고 ‘이지함’ 곁을 지나면서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은 보지 않고 남의 걱정이라며 비웃는다.

토정이 놀라 불러도 대답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걸음이 빨라 도저히 잡히지 않는다. 놀라 축지법을 사용하여 앞에 서며 정중히 인사한다. 지금 당신이 남의 걱정보다 당신 먼저 급함을 깨달아야 한다며 충고한다.

저는 내일 午時로 알고 있다고 항의하니 子時와 午時는 서로 상충하는 법이라며 지게를 버리고 표현이 살아진다. 

잠시 뒤 천둥 번개와 큰비가 내리며 전답이 물속으로 잠기며 바다로 잠긴다. 소금장수  지게를 바친 작대기 끝까지 물에 잠긴다. 토정의 말을 듣고 피난한 사람만 목숨을 보전한다. 그리고 나루 가운데 많은 바위 군이 생긴다. 그 바위는 부잣집 장독대라 부르며 영웅 바위라 부른다.

오늘날 서해 고속 도로 행담 휴게소에 해당된다. 여기도 전설이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야간에 아산만 침략 시 많은 군사로 오인하고 물러갔다 전해진다. 오늘날 예산 당진 홍성의 서해 ‘소들강문’ 평야의 젖줄이 되어 풍요한 삶을 제공한다.

이지함은 누구인가?

이지함는 土亭이며 충남 보령 출신으로 1517년 출생이며 선조시 영의정 ‘이산해’ 숙부다. ‘서경덕’ 문하생이며 우리나라 서민들과 친숙한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학문은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 經世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축지법을 터득하였고 농업과 상업의 보충 관계를 강조하였다 한다.

평생 서민을 대변하며 벼슬살이는 뒷전이다. 오 십육 세에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여 황폐한 고을 재정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나 중앙정부와 (오늘날 지방정부의 현실과 대동소이함) 뜻이 맞지 않아 일 년 봉직하고 쉬다가 아산 현감에 취임한다. 첫째 사업이 걸인청을 개설하여 노숙자를 구제한다. 둘째는 아산 특산물이 ‘가물치’인데 토산품으로 인정되어 조정에 진상 품에 선정되니 많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여기에 군민 들 원한이 하늘을 찌른다.   토정이 단호히 거부하며 ‘가물치’ 양식 호수를 메워 없애 버리니 선덕을 찬양하며 인기 만점이다. 아산 현감 근무 기간은 단 삼 개월이다. 그러나 그가 저승으로 돌아가자 아산 주민들은 마치 부모가 돌아간 듯 삼 일을 호곡하며  장례절차를 진행 하였한다.

발자취는 묘소는 보령시 청라면에 존재하며 생전 살던 동네는 서울 마포구 토정동에서 흙으로 설치된 토굴에 살면서 위에 자리를 깔고 공부하여 土亭이라 명명되어 내려온다, 특히 정자에 민중들이 운세를 보러 찾아오니 귀찮아서 일정 공식을 만들어 자기들이 알아서 판단하라며 제시한 책이 토정비결이다.  21세기 첨단 과학 문명에서도 오늘날 서민들 가슴팍을 찾아 들며 직업군으로 공부하며 서민들에 봉사한다. 엉뚱하게 정치권에 흘러 다니며. 惑世誣民으로 귀결되는 부작용이 전개된다. 현재도 서울시 마포구 토정동 138번지에 토정 선생이 살던 집터에 삼성아파트가 있고 표지석이 설치되어있어 토정로란 도로명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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