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주 수필가, 대전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이득주 수필가, 대전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당진신문
이득주 수필가, 대전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당진신문

엊그제가 할아버지 제사였다. 새벽부터 일찍 서둘렀건만 선산에 도착하니 열한 시다. 상석을 닦아내고 준비해간 제수를 꺼내 진열했다. 겨울바람 때문인지, 차가운 화강암 바닥 때문인지, 꺼내 놓기가 무섭게 차디찬 음식으로 변했다. ‘따뜻한 집안에서 예를 갖추지 못하고 솔잎도 떨고 있는 산속에서 제사를 지내 죄송합니다.’ 먼저 사죄의 말씀을 올렸다. 

할아버지께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이런 낮 제사는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3년 전까지 어림도 없는 예법이다. 아버지는 평생 유교 격식에 맞게 자시가 넘어야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난 동생들을 참석하기 쉽게 한다는 명분으로 작년부터 낮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버지가 옆에 계셨으면 말할 것도 없이 이놈하고 작대기로 얻어맞을 일이다. 

혹시나 아버지가 나타나실까 봐 얼른 제사를 마치고 산 아래 고향 집으로 내려왔다. 몇 달 만에 들른 빈집 마당엔 바짝 마른 밤나무 잎사귀들이 주인 대신 바람에 떨고 있었다. 대문을 열고 무너진 곳은 없는지, 수돗물이 새지 않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외출로 해 놓은 보일러가 정상으로 돌아가 한숨 돌렸다. 집에 왔으니 마당은 쓸어 놓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빗자루를 찾느라 창고 문을 열어 보았다. 벽에 간격을 맞춰 가지런히 걸어 놓은 농기구 중에 살포*가 보였다.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물건이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에 흠뻑 젖어 보이는 살포는 누렇게 녹은 슬었지만, 생전의 할아버지처럼 마른 체구에 둥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동네 이장을 20년이나 하셨다. 어찌 그리 오래 하게 되었는지 어릴 적 일이라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부락에 할아버지만 한 식자가 없었지 싶다. 아무튼 지금으로 치면 상당 기간 장기 집권한 셈이다. 그렇다고 이장이 인기 좋은 자리도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해가 올라오기도 전 새벽이면 벌써 마당에 인기척이 들렸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마을 사람들이다. 일터에 나가기 전 들린 것이다. 할아버지는 옆에서 자는 나를 깨고 마을 사람들을 사랑방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밀린 세금을 내 달라는 아저씨, 출생신고를 못 했다며 도장을 놓고 가는 아주머니, 벼 매상 가마를 늘려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 식전 내내 사랑방은 북적거렸다. 
  
“그려 오늘 면에 나가서 처리해 줄게.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 일들이나 해” 

동네 사람들 때문에 아침을 늦게 잡 숟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으면, 반갑지도 않은 면서기나 지서 주임들이 둔탁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그들은 가방에서 공문과 반공 포스터 같은 서류를 방안 가득 솟아 놓고 할아버지에게 숙제를 내는 듯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점심때가 된다. 손님들은 으레 점심을 먹어야 우리 집을 떠났다. 시골이다 보니 마을에 식당이 있을 리 없고 차가 없어 걸어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왔으니 그냥 보낼 수도 없다. 일주일에 이삼일은 그랬지 싶다. 사랑방으로 밥상을 내가는 할머니는 먹을 만한 반찬이 없다며 연신 허리를 구부리셨다. 

그 당시는 주민 누구나 제때 세금을 못 낼 때다. 그만큼 어렵게 살았다.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 60년대 시골엔 워낙 돈이 없을 때가 아닌가. 세금 납부실적이 저조하면 면에서는 이장들을 독려했다. 아마 부락별로 서열까지 매기며 독촉했지 싶다. 할아버지는 부락 체면을 생각해 방앗간에서 쌀값을 미리 받아 와 동네 밀린 세금을 대납하셨다. 그리고는 서서히 받으러 다녔지만, 워낙 어렵게 살던 동네 분들한테는 끝내 받지도 못하고 떼인 경우도 많았다. 그건 할머니가 은밀하게 알려준 오래전 비밀이다. 

삼십 사 년 전 일월, 집 앞 천수답에는 하얀 쌀가루 같은 가루눈이 소리 없이 쏟아졌다. 가을을 거둬들이고 남은 까까머리 그루터기만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날 새벽 칠십 구세의 할아버지도 눈발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백호가 넘던 동네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지 싶다. 마당 한쪽에선 누가 불을 피웠는지 장작 불꽃이 빨랫줄을 끊어 버릴 듯 활활 타올랐다. 할아버지한테 이장 수업을 받던 섭실 당숙은 언제 오셨는지 구정물 돼지를 끌어내 멱을 따고 계셨다. 다른 사람들은 차일을 치고, 장작을 패고, 청년들은 한 움큼씩 부고장을 들고 이웃 마을로 떠났다. 오후가 되니 눈도 녹고 언제 그렸느냐는 등 따스한 햇볕이 차일 위로 쏟아졌다. 할아버지 마음처럼 사흘 내내 포근했다.      

장례 동안, 동네 사람들은 모두 농사일을 멈추었다. 장례를 도우며 이십 년 동안 이장을 하신 할아버지를 추모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었지만, 안방 아랫목에 모신 할아버지 시신은 사흘 동안 마을 사람들의 인정으로 따뜻했다.  

창고에 걸린 살포를 보니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돌아오신 것만 같다. 풀 먹인 하얀 모시옷에 참죽나무 자루가 유난히 반짝이던 살포를 들고 아침마다 논에 가는 할아버지는 위엄이 있었다. 살포는 장군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휘봉 같았다. 우리 형제들도 감히 만져 보지 못한 귀한 물건이다. 

할아버지는 삼십사 년 전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침마다 논에서 물꼬를 트고 낮에는 동네 사람들의 민원 담당관으로 권위가 있으셨던 할아버지 대신, 창고에 걸린 살포가 그동안 우리 집을 지켜주고 있었다. 벽에 걸린 살포를 보니, 노을 진 물꼬에 서 계시던 할아버지와 정담을 나누시던 동네 어른들 얼굴이 흑백영화처럼 지나갔다.   
    
*살포 :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에 쓰는 네모진 삽. 논에 나갈 때 지팡이 대신 짚고 다니기도 했다.


이득주

송악읍 봉교리 출향, 2019 한국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대전문인협회. 대전수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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