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캥이 학살 희생자 이충범 선생 아들 이재환 씨가 최초로 꺼낸 가족사
“일제 시대에는 반일 운동했다고 탄압, 해방 이후에는 좌익이라고...”
“빨갱이로 낙인 찍힌 억울했던 많은 유가족들의 설움 꼭 풀어주길”

한진포구 목캥이 일원. 최근 이곳에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과거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역사적 현장은 자칫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당진신문 지나영 기자
한진포구 목캥이 일원. 최근 이곳에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과거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역사적 현장은 자칫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당진신문 지나영 기자

“어릴 적 한진포구의 목캥이 인근에서 어업을 하던 어른들이 어느 날부터 피가 흘러들어 석화를 딸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서야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목캥이에서 있었고, 그로 인해 흘러든 피라는 것을 알았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으면, 피가 흘러 들어서 석화에 스며들 정도 였겠어요. 그만큼 참혹했던 현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한진에 거주하는 익명의 제보자

[당진신문=지나영 기자] 국민보도연맹은 지난 1948년 12월에 국가 보안법이 시행됨에 따라,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결성한 단체로써, 지난 1950년 6월부터 9월까지 한국 전쟁 초기에 수 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됐다.

학살 사건은 전국 곳곳에서 진행됐으며, 당진에서는 한진포구의 목캥이가 국민보도연맹 학살지로 밝혀졌다. 그러나 5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당진시 유족회는 결성되지 않은 상황. (관련기사:국민보도연맹 학살지 당진 한진포구...“완전한 진실규명 필요”, 1385호)

이에 국민보도연행 학살 희생자 고 이충범 선생의 아들 이재환(91세) 씨가 학살 사건에 대해 당시의 참혹함과 유가족이 겪어야 했던 힘든 시간들을 본지를 통해 처음으로 밝혔다. 

당진에서 태어난 고 이충범 선생은 민족 운동 단체 신간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당시 조선일보 당진지국 기자로 일했던 이충범 선생은 지난 1939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했고, 5년이 흐른 44년에 귀국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1939년도에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한다고 만주로 망명하셨어. 반일 운동가로 낙인찍힌 아버지 때문에 일본 순사들이 갑자기 우리 집으로 가택수사를 하러 엄청 자주 왔지. 순사라는 사람들은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와서 살림살이를 뒤집어 놓고, 그냥 가버리고... 그때 어머니와 나는 순사가 집에 올 때마다 겁을 먹어야 했고, 무척 힘들었어. 그러다 아버지는 1944년도에 만주에서 조국으로 귀국하셨는데, 오셔서도 독립운동을 하신다면서 집에 자주 계시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 

독립을 갈망하는 우리 민족의 염원으로 지난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 그러나 이충범 선생은 독립운동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해방 이후 오히려 또 다른 낙인에 찍혀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해방 이후 아버지는 노동당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정치 활동을 하셨는데, 그 이유로 좌익단체로 낙인찍혀서 사회주의자라며 손가락질을 받았어. 그래서 아버지는 경찰에 노다지 끌려갔고, 교도소도 가고 그랬지. 있는 재산으로 아버지를 경찰서에서 빼느라고 집안 경제 상황은 나빠져서, 나는 학업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짐을 싣는 일을 했던 나에게 경찰관들은 이유 없이 짐을 내리라고 명령해서 수색을 받았고, 발길질도 당하거나 그냥 맞을 때도 많았어. 그러다 아버지는 1947년부터 집에 계시면서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어. 내 기억으로는 그래. 그런데 도대체 3년이 지나고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국민보도연맹 학살 희생자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어”

이재환 씨는 아버지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서만 계시기에 더 이상 경찰서에 끌려 갈 일은, 그리고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하고, 한 달이 지난 7월 어느 날 당진경찰서 경찰관들은 이충범 선생을 다시 잡아갔다.

한진포구 목캥이 일원. 최근 이곳에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과거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역사적 현장은 자칫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당진신문 지나영 기자
한진포구 목캥이 일원. 최근 이곳에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과거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역사적 현장은 자칫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당진신문 지나영 기자

“1950년 6월 15일 전쟁이 시작되고, 북한군은 서울로 밀고 들어왔잖아. 그러고 7월 5일인가, 6일이었을거야. 경찰관이 다시 아버지를 끌고 가더라고? 왜 데려갔는지 이유도 몰라. 그저 다시 오실 줄 알았지, 그 날이 아버지를 뵌 마지막 날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렇게 이유도 모르고,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 체 일주일이 지나고 7월 12일에 한진포구 앞 바다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러 갔는데, 아버지를 포함한 7명의 시신이 포승줄에 묶여서 해안가에 눕혀져 있더라고. 도망을 못 가게 포승줄로 묶여진 7명의 가슴에는 총탄 두 발씩 맞아서 총구멍이 뚫려 있었어. 나는 7명의 시신만 봤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거기서(목캥이)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나는 아버지 시신을 수습한 후에는 목캥이에 간 적이 없어, 아니 못가겠더라고...”

50여 년간 이재환 씨는 누구에게도 가족사를 말하지 못할 만큼 힘들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에는 일본에게 반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방 이후에는 독립운동을 한 좌익이라는 이유로 어느 시대에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설움 가득했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더욱 가슴에 묻고 살아야만 했다고.

“우리 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활동을 하셨을 뿐이야. 그런데 나와 우리 어머니는 조국이 해방되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빨갱이라고 낙인찍혀서 힘들고 서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지. 그래서 누구에게도 내 심정을, 내 이야기를 꺼내놓았던 적이 없어. 기자님에게 처음 말하는거야. 그동안 좌익이라고, 그리고 빨갱이라고 낙인찍혀서 죄인으로 살았던 설움을 어떻게 보상받겠어. 다만, 내가 지금이라도 말하는 이유는 우리 아버지가 왜 학살을 당해야 했던 것인지 알고 싶고, 그리고 국가에서도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해줬으면 바라는 마음으로 결심한거지. 분명 나처럼 억울하고 힘들게 살아야 했던 유가족이 있을테니까, 국가가 책임을 갖고 우리의 설움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털어놓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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