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손의 번영을 바라며 심은 ‘삼월리 회화나무’
복지겸 장군과 두견주 설화가 얽힌 ‘면천 은행나무’
시내 한복판에 거대한 나무가? ‘당진성당 앞 은행나무’
대기업 회장도 반했던 웅장한 자태 ‘시곡동 소나무’

[당진신문=이석준 기자] 불과 이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를 벗어나면 마을 어귀와 산, 언덕에 자리잡은 거대한 나무를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된 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소이자 쉼터 역할을 했다. 또한 수령이 오래될수록 영험하다 여겨 마을의 수호목으로 삼거나, 오색 천을 걸어놓고 신성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화가 진행되고 곳곳에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요즘 거대한 나무의 존재는 자리를 차지하는 방해물로 치부됐다. 급격한 개발과 산업화의 흐름 속에 보호받지 못한 오래된 나무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당진 또한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나무가 잘려나가고 그 자리에는 건물이 들어섰다.

수 백년 자리를 지켜오던 나무가 사라짐에 따라 나무의 역사적 가치, 전설, 설화 등 이야기들도 함께 사라져 갔다. 당진 곳곳에 존재하는 오래된 보호수와 그에 얽힌 민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선비들이 즐겨심어 학자수로 불렸던 삼월리 회화나무

천연기념물 제317호 송산면 삼월리 회화나무. 
천연기념물 제317호 송산면 삼월리 회화나무. 

송산면 삼월리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웅장한 회화나무 한그루가 있다. 삼월리 회화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는 1982년 천연기념물 제317호로 지정됐다. 높이는 약 18m, 둘레는 약 5m로 사방으로 고르게 뻗은 가지들로 인해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학자수로 불리는 회화나무는 모양이 둥글고 온화해 중국에서는 높은 관리의 무덤이나 집에 많이 심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향교주변이나 양반가문의 집 주변에 많이 심었는데 당대의 사람들은 집에 회화나무를 심어두면 자손이 번영하고, 집안에서 큰 인물이나 학자가 배출된다고 믿었다.

또한 회화나무는 잡귀의 접근을 막아 집안이 평안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삼월리 회화나무는 조선 중기 홍문관 대제학, 사간원 대사간직 등 여러 고위관직을 지낸 덕수이씨 가문의 문신 이행(1478~1534)이 말년에 고향인 송산면 능안으로 낙향해 자본의 번영과 큰 인물이 나기를 바라며 심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능안 묘역 일대가 생태공원으로 정비돼 생태공원과 쉼터로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또한 삼월리 회화나무 주변은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어 향후 시민들의 쉼터이자 문화공간으로 활용 될 계획이다.

●복지겸 장군과 두견주의 설화가 얽힌 면천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551호 면천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551호 면천 은행나무.

면천면 성상리 면천초등학교 안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지난 2016년 천연기념물 제 551호로 지정된 면천 은행나무는 큰 것은 높이가 20m 둘레는 6m이다. 수령은 1,100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면천 은행나무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이미 조선총독부에서 지정한 보호수였다. 당시에는 백로가 날아와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또한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과 면천 두견주에 얽힌 설화도 전해진다.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이 백약이 무효한 중병에 걸려 병세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그때 당시 17살이던 그의 어린 딸 영랑이 아미산에 올라 백일기도를 드리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복지겸 장군에게 두견주를 빚어 마시게 하고 뜰에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들이면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영랑이 이를 그대로 따랐더니 장군의 병이 치유됐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면천 은행나무의 수령이 1,100년이니 고려초에 심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복지겸 장군 설화와의 연관성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1,100년간 마을을 지켜온 은행나무를 영험하게 여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겼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목신제를 지내왔다.  

일제강점기에 서술된 <당진군사>에 따르면 고려 개국공신 복지겸 장군의 저택이 면천 공립 보통학교 부지 내에 있었다고 한다. 그 위치는 현재 면천객사와 면천 은행나무에 인접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까지 복지겸 장군의 저택이 남아있었던 것인지, 있었다고 전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시내 한복판에 거대한 나무가? 오랜기간 시민들과 함께해온 당진성당 은행나무

충청남도 보호수인 당진성당 입구 왼쪽에 위치한 느티나무.
충청남도 보호수인 당진성당 입구 왼쪽에 위치한 느티나무.
충청남도 보호수인 당진성당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은행나무.
충청남도 보호수인 당진성당 입구 오른쪽에 위치한 은행나무.

당진시 읍내동에 위치한 당진성당 입구 오른쪽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성당 입구 왼쪽에 위치한 느티나무가 있는데 두 나무 모두 충청남도 보호수다.

당진성당 입구 양쪽은 거대한 나무 두 그루의 모습이 장관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여름철 시민들의 쉼터로 이용됐고, 졸업사진이나 입학사진,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도 애용됐다. 조선시대에는 시객들이 나무 아래서 노닐며 시를 읊었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이 그해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아래 벤치가 설치돼 작은 공원과 같은 형태를 갖춰 시민들의 휴식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은행나무의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나무 하단에 거대한 공동과 상처가 곳곳에 있었다. 당시 나무의 공동에는 한 여성 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옷가지에 붙은 불이 나무로 번져 나무 밑둥을 태운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공동이 채워져 그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대기업 회장도 반했던 웅장한 자태, 시곡동 소나무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된 시곡동 소나무.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된 시곡동 소나무.

당진시 시곡동 산 230에는 500년이 넘은 소나무가 있다. 창녕 성씨 묘역에 위치한 시곡동 소나무는 오래된 거목으로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가히 압도적이다. 나무의 높이는 약 18m 둘레는 5.4m로 1982년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된 후에도 창녕 성씨 문중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시곡동 소나무는 창녕 성씨 문중의 수군 절도사 성준길(1579~1624)의 자손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과 4.19혁명, 5.16쿠테타 등 나라의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가지가 말라죽어 변고를 미리 알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나무에 반한 일본인이 나무를 일본으로 반출하려 했다거나, 모 대기업 회장이 직접 구매의사를 밝혔다는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창녕 성씨 문중회장을 역임한 성낙현씨는 “모 대기업 회장이 구매의사를 밝혔다는 일화는 사실이다.

약 50년 전 모 대기업 회장이 아버님께 그 당시 기준으로 꽤 큰 금액을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의 재산이라 정중히 거절했다고 알고 있다”며 “나라의 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가지가 말라죽었다는 말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아마도 나무가 워낙 웅장하고 기품있다 보니 이를 신성하다 여긴 사람들이 많아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고 웃어보였다.

그러면서 시곡동 소나무의 진정한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진시 곳곳이 개발되는 상황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오래된 거목의 수가 적어 그 존재만으로도 특별하다는 것.

성낙현씨는 “창녕 성씨 묘역에 위치한 시곡동 소나무의 주변은 원래 오래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며 “원래 주변에 더 오래되고 웅장한 소나무들이 많았는데 개발 과정에서 다 잘려나갔다. 이곳 묘역만 문중(법인)의 땅이라 소나무가 남아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오래된 나무들을 보존해 그 웅장한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개발이 한참이던 당시는 나무를 보존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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