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당진 합덕 소소리 유적과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철기
[오피니언] 당진 합덕 소소리 유적과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철기
  • 당진신문
  • 승인 2021.07.30 19:12
  • 호수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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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수 국립청주박물관장

우리나라에서 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큰 아산만. 1971년 하천의 하구를 막으며 국토를 넓히기 위한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유명한 장소다. 이곳 인근의 당진시 합덕면 소소리 전 64-27에서 많은 청동기와 함께 철기가 발견됐다. 

정식 발굴 조사가 되지 않았지만 장수 남양리, 부여 합송리 등지에서 발견된 바와 같이 잔무늬거울, 청동칼 등 한국식 동검문화와 함께 전국 연나라의 철기가 함께 출토된 것이다. 

출토된 것 중 다뉴세문경이나 한국식동검과 같은 청동기와 석기, 토기는 재지의 것이었다. 하지만 철기는 이전까지는 확인되지 않았던 것으로 연구 검토 결과 중국 전국시대 전국칠웅 중 하나로 가장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연나라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목걸이로 사용된 유리구슬은 부여 합송리 등지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더 남쪽의 전국 초나라 언저리의 것이었다. 

철기가 걸어온 육로

당진 합덕 소소리 유적은 전국 연나라의 철기가 출토됐다. 전국시대, 지금의 중국 북경 근처 가장 동쪽에 있는 연나라였다. 연나라의 수도는 연하도(燕下都)로 이곳에서는 왕의 거처, 무덤과 다양한 공방지가 발굴됐다. 

전국시대 연나라는 주조철기를 만드는 강국이었으며, 산동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던 전국 제(齊)는 단조철기를 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 당진 합덕 소소리에서 출토된 철기들은 주조철기로 전국시대 연나라의 철기이다. 그 이유는 위원 용연동 유적에서 출토된 사례와 같이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초기의 철기는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함께 출토되기 때문이다.  

연나라 철기가 유입된 것은 연나라 소왕(昭王) 대, 장군 진개(秦蓋)가 고조선에게서 서방 이천리의 땅을 빼앗은 기원전 3세기 전엽의 언저리로 생각된다. 결국 이 시기를 기준으로 철기라는 존재가 한반도 남부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명도전과 함께 전국 연의 철기가 출토되는 사례는 중국 동북지역이나 한반도 북부에서는 꽤 많이 발견된다. 출토된 지역을 연결하면 연하도(燕下都)-능원(凌源)-조양(朝陽)-금주(錦州)-본계(本溪)-단동(丹東)-한반도(韓半島)로 이어지는 대략의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와 달리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는 전국계 철기는 명도전과 동반하는 사례가 없다. 

또한 철기와 동반하는 유물들은 주로 한국식 동검, 다뉴세문경 등이며, 특이하게 한반도 서남부에서는 유리와 동반하는 사례가 당진 합덕 소소리, 부여 합송리, 완주 갈동 등지에서 확인된다. 하지만 한반도 북부에서는 유리와 동반하는 사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합덕읍 소소리 유적 출토 유물.
합덕읍 소소리 유적 출토 유물.

유리가 전해진 해로

소소리 출토 유리관옥은 납-바륨 유리로 생각된다. 납, 바륨, 포타쉬와 같이 유리를 만들 때 넣는 다양한 성분 때문에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를 나타낸다. 보통 납 유리군, 포타쉬 유리군, 소다 유리군, 알칼리 혼합 유리군 등으로 구분되는데, 납-바륨 유리는 서양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동양 유리의 특징이다. 

특히 이런 유리는 중국 남부와 관련되는 것으로 당진 합덕 소소리를 비롯하여 부여 합송리, 완주 갈동·신풍 등지에서 출토된 초기의 유리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납-바륨 유리는 전국시대 중국 동남부의 호남성(湖南省), 호북성(湖北省) 일대에 자리잡은 초(楚)와 중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그보다 남쪽에 위치한 전국 월(越)은 칼륨 함량이 높은 포타쉬 유리를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검에 장식되어 있는 유리가 있다. 

포타쉬 유리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제작되며 기원전 1세기 이후, 한반도 서남부의 연천 학곡리, 평택 마무리 등지에서도 확인된다. 

대동강유역에서 한반도 서남부로

육로를 통해 들어온 철기와 해로를 타고 들어온 유리가 만난 곳은 대동강 유역이다. 이곳에서 다시 한반도 서남부로 전해지던 주요한 교통로는 육로였을까 해로였을까? 

이와 관련해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원전 194년 즈음에 위만(衛滿)에게 조선을 빼앗기고 한지(韓地)로 옮긴 준왕(準王)에 대한 기록이다. 후한대(後漢代)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과 280년대에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지로 옮겨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급박한 상황이었고,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가기 위해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하였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 대에 한반도 서북부와 한반도 서남부를 잇는 해상 교역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전국계 철기와 유리의 분포를 주목해야한다. 전국계 철기는 그 분포 범위가 장수 남양리와 같이 내륙 깊숙한 곳으로도 유입되고 있다. 이에 반해 유리는 당진 소소리의 아산만 문화권, 공주 수촌리의 금강 문화권, 전주 원장동, 완주 신풍·갈동의 만경강 문화권, 함평 초포리의 영산강 문화권으로 구분되지만 모두 큰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다. 

결국 물자나 문화의 이동이 바다라는 대동맥을 중심으로 강이라는 모세혈관을 타고 내륙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또한 유리는 전국계 철기와 달리 내륙 깊숙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이는 기존의 벽옥제 관옥이라는 대체할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일 예로 다뉴세문경이 출토된 청주 오송 유적의 경우 출토되는 관옥은 모두 유리가 아닌 광물제이다. 이러한 양상은 유리가 출토되는 지역에서도 동일한 양상이어서 화순 백암리 유적의 경우도 광물제의 관옥을 부장하였다. 

해상교역의 실태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해상 교류가 가장 빈번한 곳은 한반도 남부와 일본 구주(九州)이다. 그 이유는 거리가 가깝고 양 지역 사이에 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동해는 울릉도와 독도가 있지만 너무나 떨어져 있어 동해를 가로지르는 교류는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서해는 중국과의 해상 교류의 중심지로 산둥반도(山東半島)와 다렌(大連)을 가로지르면 한반도로 아주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문화교류가 있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유리라는 새로운 소재가 멀리서부터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그리고 아산만 일대를 주름잡던 당진 소소리의 지배자는 자신들의 청동기·석기·토기 문화를 기반으로 중국 동북부 연나라의 철기와 중국 남부 초나라의 유리와 같은 신문물을 해상교역을 통해 받아들여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