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신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19C초 당진현에서 작성된 안흥진 수군 군적부
19C초 당진현에서 작성된 안흥진 수군 군적부

水軍 주둔 현장에서 발견된 군적부는 안흥진(安興鎭) 수군 군적부가 최초
당진현 8개 면에서 수군 명단을 작성하여 당진 현감이 확인
안흥진 수군의 운영을 위하여 군포(軍布)를 받을 목적으로 군적부 작성 

[당진신문=진호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20년 4월 22일 태안 안흥진성 인근 신진도 고가(古家)에서 조선 후기 수군(水軍)의 명단이 적혀 있는 군적부(軍籍簿)를 지역 주민의 신고로 발견했다. 

고가(古家)의 벽지로 사용된 수군 군적부는 19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안흥진 소속 60여명의 군역 의무자가 수군(水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뉘어 이름, 주소, 나이, 신장, 부친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수군의 출신지는 모두 당진현(唐津縣)으로 당시의 당진 현감 직인과 수결(手決)이 확인되었다.

내용으로 보면 수군(水軍) 1인에 보인(保人) 1인으로 편성된 체제로 16세기 이후 수군편성 체계를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이며, 국가에서 관리하던 문서가 수군 주둔지역인 신진도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군적부의 용도는 작성 형식이나 시기로 미루어 수군의 징발보다는 군역 부과 방식인 군포(軍布)의 수취를 주목적으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군적부에는 거주지가 적혀 있어 군역에 충당된 사람이 당진현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군적부 총 4장에는 거주지 8개 지역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 지역들은 지방지도, 당진현지도를 통해 당진현에 위치한 8개면(面)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C 후반 당진현 지도
19C 후반 당진현 지도

당진현은 현내면(縣內面)·동면(東面)·남면(南面)·고산면(高山面)·내맹면(內孟面)·외맹면(外孟面)·상대면(上大面)·하대면(下大面)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진현의 8개면은 당진현 관아(官衙)가 있는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중앙의 현내면과 동서남북 방위(方位)체제로 동면·남면·고산면·내맹면·외맹면·상대면·하대면이 설정되었다. 고산면은 당진포가 있었던 당진포리와 적의 침입과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고산 봉수가 있었던 면이다. 

내맹면·외맹면은 맹곶(孟串)을 포함한 지역이고,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상대면·하대면은 서쪽에 위치한 면인데, 하대면 진관리는 백제 때 이곳이 당나라로 통하는 길이어서 행인을 도와주는 진관(眞館)이 있었다고 한다. 고산면·내맹면·외맹면·상대면·하대면은 해안 방비와 바다를 통한 교류가 당진의 내륙지역들보다 훨씬 수월한 곳이었다.

안흥진 수군 군적부에 실린 당진현 지역 수군 수
안흥진 수군 군적부에 실린 당진현 지역 수군 수

신진도 고가 벽지에서는 군적부 이외에도‘행현감 권(行縣監 權)’이라고 쓰인 수결(手決)이 군적부와 함께 나왔다. 현감 ‘權’은 수군 군적부에서 모두 당진현 지명이 나왔기 때문에 당진현감으로 볼 수 있다. 군적부 작성시기를 파악하기 위하여 권씨 성을 가진 당진 현감들을 조사하였다. 

당진 현감 중에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은 총 8명이다. 군적부 시기가 조선 후기 인만큼 조선전기 인물 4명은 제외하고, 당진 읍선생안(邑先生案)에서 유력한 4명을 조사하였다.

이 중에 제일 유력한 현감은 바로 현감 권교인(權敎仁)이다. 권교인은 1815년 8월 21일에 호조좌랑에서 당진현감으로 부임했고 1820년 6월 24일 임기를 마치고 종묘령으로 부임했다. 

군적부의 편찬 시점은 상서·하서의 지명과 하대·상대의 지명이 혼용되어 쓰인 과도기적 시기 즉, 당진 현감 권교인의 부임 시기인 1815년에서 1820년 사이로 보인다. 

19C 당진 현감 재직 시기
19C 당진 현감 재직 시기

나머지 현감들은 고종 즉위(1863) 이후의 현감들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관에서 문서를 생산할 때 행정지명을 바꾼 지 70년 정도 지난 상황에서 예전 지명인‘상서·하서면’지명을 재사용하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군적부가 작성된 시기를 판단하기 위하여 군적부에 나오는 당진현 지명과 그 지명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이 문서를 확인하여 주었던 당진 현감‘權’의 존재시기를 일치시킴으로써 결국 이 군적부는 19세기 초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신진도 군적부의 작성 시기가 밝혀짐에 따라 19세기 초 신진도 주둔 수군의 운영방식과 실태도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신진도 주둔 수군을 운영하기 위하여 당시 당진현에서 군포를 받아 급료를 제공하고 있으나, 둔전(屯田) 등이 부족하여 수군들도 어업으로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군적부가 발견되었던 신진도 고가는 이러한 수군 관리를 위한 관가(官家)의 건물로 추정이 된다. 

그 이유는 군적부가 이 가옥에서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의 형태와 구조가 이러한 사실을 대변하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이 고가에 거주하였던 주인공은 군포를 거두어서 수군을 관리하였던 관리(官吏)일 확률이 매우 높다. 신진도 고가의 후손에 의하면 원래 방 5칸, 광 6칸, 부엌 3칸, 소 외양간, 말 우리 등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가옥 구조로 보아 신진도 고가는 군포, 곡식 등 세금을 거두어 수군을 관리하는 건물이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C 당진 현감이 작성한 안흥진 수군 군적부는 우리나라 민간에 존재하는 수군 군적부 2건 중 하나이다. 매우 소중한 문서로서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된다면 조선 후기 수군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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