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충남도립대학교수

[당진신문=김정희]

인간이나 예술작품은 시간이라는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항해하는 끝없는 미완성이다. 비록 세상에는 수많은 이론과 이론가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제아무리 위대한 거성과 거대 담론이 있다 할지라도 단지 흐르는 시간 속의 존재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는 뜻있는 개성적인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숙명적이고, 연약하고, 한계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은 루카치의 말처럼 길이 끝나는 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 속에 인간의 정체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존재(be-ing)가 되어가는 존재에게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즉 살아가는 과정, 사랑하는 과정, 연구하고 탐색하는 과정들이 존재에게는 중요하다. 존재가 아니라 존재 되어가는(be-ing) 인간과 예술작품은 끊임없이 아름답게 빚어져 가는 것이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대중가요 속에도 위대한 철학이 숨어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지식은 새것보다는 반복 현상을 보인다. (니체의 영원회귀)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존재 망각의 잠에서 깨어나라”했으며, 공자는 “너답게 살아라”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지식의 열매를 따 먹은 너희 죄 값은 내가 다 지불 했느니라. 안심하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라”라고 했다. 그리고 부처님은 “금수 초목이 다 깨달았는데 인간 너희만 아직 깨닫지 못해 번민하는구나. 빨리 깨닫고 해탈하라”고 했으며, 노자는 무위자연을 가르친다. 이러한 시원의 수원지 사상과 종교는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장까지 끈김없이 흘러내려 이 불안한 시대의 생명수가 되어주고 있다.

아무리 존재가 시간 앞에 소멸되어 간다 해도 위 성인들의 빛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라는 철학밖에 처소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아도 오늘 이 땅에 예수님의 깃발 아래 천만 명이 모여있다 하고, 부처님의 깃발 아래 이천만 명이 모여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나머지는 공자의 유교와 노자의 도교 아래 모여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문학가와 예술가들은 많은 경우 위의 깃발 그 어느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산되어 기속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5대 성(聖)의 뜻을 규합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너와 세상은 
불확실하니 (소크라테스)
각자 제자리에서 (공자)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사랑하고 (예수)
욕심을 버리고 (부처)
물처럼 흘러라 (노자)

이처럼 요약되는 한마디는 이 세상의 가장 큰 등불이 되어 빛을 발하고 있다. 또한 마벌은 ‘수줍은 연인에게’라는 시(詩)에서 사랑을 구체로 비유하여 그 완전한 영원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시간 속에 흐르는 우리의 귀중한 생명은 살아가는 과정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항상 명심하자.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