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위) 機(기) 一(일) 髮(발) - 위급하여 매우 절박한 순간


당나라 때 맹교는 자를 凍野(동야)라 하고, 諡號(시호)를 貞曜 先生(정요선생)이라 하였다. 浙江省(절강성) 후저우 우캉 출신으로 46세가 되어서야 겨우 進士(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각지의 변변찮은 관직들을 맡았다. 또한 가정적으로도 불우하여 빈곤 속에서 죽었다.


맹교는 韓愈(한유)와 가까이 지냈으며 그의 復古主義(복고주의)에 동조하여 작품도 樂夫(악부)나 古詩(고시)가 많았는데, 古風(고풍)속에 예리하고 창의적인 감정과 사상이 담겨 있다.


또한 한유의 시호는 文公(문공)이며, 懷州(회주) 수무현 출생이다. 792년 진사에 등과, 지방 절도사의 속관을 거쳐 803년 監察御使(감찰어사)가 되었을 때, 首都(수도)의 장관을 탄핵했다가 도리어 양산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소환된 후로는 주로 國子監(국자감)에서 근무하였으며 819년 吳元濟(오원제)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刑部侍郞(형부시랑)이 되었으나, 819년 헌종 황제가 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한유는 헌종 황제가 부처의 사리를 궁궐에 모셔 놓고 국태민안을 내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이에 대하여 극구 반대를 하는 상소를 올려 좌천되었던 것이다.
조주로 좌천된 한유는 그 곳의 스님과 사귀면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한유가 불교의 신봉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절친한 친구인 맹교에게까지 들리게 되었다.
맹교는 한유의 진실을 알고자 편지를 보내어 내막을 알려고 하였다.

한유는 즉시 자세한 내막을 알리는 회답을 보냈다. ‘불교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고 사직은 위태롭기가 마치 털 한 가닥에 매달린 수천 근의 쇳덧이와 같다.’라는 조정과 불교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보냈던 것이다.

<자료제공 : 장원한자 당진지점 문의 ☎ 358-0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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