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68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북괴가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한 그날,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제1사단 15연대 이익수 대령, 국군 장병 23명, 민간인 7명이 사망해 총 32명의 사망자와 52명의 부상자를 낸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을 알고 있는가? 오늘 NIE는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고정호 기자 kjh2010@hanmali.net

▶1.21 청와대 기습 사건 … 사망 32명, 부상 52명

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박정희 암살지령을 받게 된다.

당시 대한민국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상태였고 자유월남에 국군을 파병하여 공산군과 맞서고 있는 때였다.

당시 김일성이 집권하고 있었던 북한은 대한민국의 월남 파병과 미국에게 신무기를 공급받자 위기감을 느끼던 상황이었다. 이에 김일성은 경제정책은 뒷전으로 삼고 군을 키우기 위해 혈안이었고 각종 무력도발 행위를 벌였었다.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을 주도한 이들은 바로 일제 강점기 때 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김일성과 함께한 김정태 조선인민군 민족보위성 정찰국장과 허봉학 조선노동당 직할 남조선국장, 김창봉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었다. (민족보위성:대한민국의 국방부, 민족보위상:대한민국의 국방부장관, 부수상:당시 김일성은 수상이었고 부수상직은 김일성 다음가는 위치) 이들은 북한 내에서 ‘항일 빨치산 1세대’라고 하여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의 친동생이며 김정일이 정계에 공식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후계자로 지목되던 김영주는 위에 언급한 빨치산 1세대 권력자들이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군에 막강한 권력과 힘을 실어줬던 시기였으니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고 북한의 권력 구도는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쯤 되자 빨치산 1세대 세 사람(김정태, 허봉학, 김창봉)들은 은밀히 계략을 꾸미기 시작한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김영주를 몰아낼 계략을 세우기 시작한 것.

어느 날 김창봉 부수상은 김정태와 허봉학에게 “동무들, 김영주 저 아새끼를 밀어내고 내가 후계자가 돼야 하지 않겠어?”라며 말을 했고 이들은 맞장구치며 모의를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김정태는 김일성의 허가 없이 단독으로 사건을 꾸미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이다.

1968년 1월 13일 조선인민군 민족보위상 정찰국장이었던 김정태는 조선인민군 124부대 소속 31명을 불러 은밀히 명령을 하달한다. “청와대를 폭파하고, 남조선 대통령 박정희의 목을 가져와라”

이러한 명령을 받은 124부대 31명 특수부대원들은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PPSH-43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개성을 떠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데 성공, 대한민국에 잠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한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최규식 종로서장과 이익수 대령과 국군장병, 민간인을 모두 포함한 32명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는 총 52명이었다.

▲ 1.21 청와대 습격 사건에서 생포된 김신조. 그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말해 큰 논란을 일으켰었다. 2011년 투항한 김신조씨는 한나라당 북한 인권 및 탈북자·납북자 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 국민을 혼란과 분노에 빠뜨린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은 예비군 창설과 실미도 부대 등에 영향을 끼쳤다.

▶1.21사태의 영향… 예비군 창설과 실미도부대

박정희 암살 시도는 이처럼 미수에 그쳤으나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한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민국 예비군(大韓民國 豫備軍)은 전역한 이후, 평상시에는 사회 생활을 하다가 유사시(有事時)에 소집되는 대한민국 국군의 예비 전력으로 적 또는 무장공비(武裝共匪)의 공세와 대남 유격에 대처, 향토 방위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1949년 일시적으로 설치되었다가 동년 8월 해체되었으나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의 1·21 사태로 인해 부활하여 2013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또, 대한민국은 당시 특수부대인 684부대(실미도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북한에 대한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보복을 위해 각 군별로 보복 부대를 창설하도록 지시, 공군 정보부는 2325부대에 명령하여 209파견대를 같은 해 4월에 창설하였다.

209파견대는 청와대를 기습한 31명과 부대 인원수를 똑같이 맞추고, 똑같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원수인 김일성을 암살하는 임무를 가지고 창설될 당시의 연도와 달의 숫자를 따서 684부대를 위장명으로 썼다.

창설 이후, 이들은 실전과 똑같은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하였다. 그 뒤 3년 4개월 동안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던 중,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등의 대화로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한과 북한 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작전 자체가 불확실하게 되어 버렸다.

가혹한 훈련과 끝없는 기다림 등 불만이 고조되었던 북파부대원들은 교육대장외 교관, 기간병 등을 살해하였다.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했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본래 31명 중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시내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자살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4명은 생존했지만 이들 모두 1972년 3월 10일 사형 당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은 갖가지 의문점을 간직한 채 30여 년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684부대의 북파부대원들이 겪은 3년 4개월 동안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1999년)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강우석 감독의 동명영화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를 비롯해 많은 점들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 1.21 청와대 기습 사건의 영향으로 창설된 684부대의 이야기를 담은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 포스터.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했으나 이 사건의 진상은 갖가지 의문점을 간직한 채 아직도 베일에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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