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처음 열린 백강해전 ‘진혼 예술제’...장소 놓고 의견 분분
당진역사연구소 김학로 소장 “역사적 기록으로 석문면 일대가 유력”

지난 10일 석문면 용무치 마을에서 개최된 제1회 백강해전 무주고혼 진혼 예술제
지난 10일 석문면 용무치 마을에서 개최된 제1회 백강해전 무주고혼 진혼 예술제

[당진신문=지나영 기자] 지난 10일 (사)내포지방고대문화연구원, 당진역사연구소, 대한상고역사순례단이 주최하는 제1회 백강해전 무주고혼 진혼 예술제를 석문면 용무치마을에서 개최했다.

진혼 예술제는 한·중·일이 함께 상생하는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기원하기 위해 그리고 1,400년 전 동양 5국 고구려, 신라, 백제, 왜, 당나라의 전쟁희생자를 위령하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열렸다.

백강해전은 서기 663년에 신라, 당나라의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 왜국(일본) 그리고 고구려 등 5개국이 맞서 싸운 전투다. 이 전투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이 충돌해 전쟁을 벌인 것으로, 663년 음력 8월 27일에서 29일까지 충남 당진 백강(석문면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다.

한편 백강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사실이 한·중·일에 지리적인 정확한 위치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전투가 벌어진 백강을 두고 전북 부안과 당진 석문면을 두고 학자들의 의견이 나뉘고 있다.

이에 당진역사연구소 김학로 소장을 만나 백강해전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를 들어봤다.


당진역사연구소 김학로 소장
당진역사연구소 김학로 소장

●백강해전은 어떠한 전투인가?

1400년전인 660년 백제가 망하고 백제부흥군은 일본에 있었던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을 데리고 주류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663년에 백제부흥군은 당·신라 연합군, 고구려, 왜군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를 백강해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당진 일대가 백제 부흥군들의 저항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위치는 기록으로 남아 있나?

많은 학자들은 전북 부안의 의금산성을 주류성의 처음 위치로 보고 있다. 이후에 백제부흥군은 주류성을 당진 면천의 몽산으로 옮겼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다만 한·중·일  기록을 보면 백제부흥군들이 당·신라 연합군, 고구려, 왜군과 전투를 벌인 위치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기록에는 백강구, 삼국사기에는 백강전투로 그리고 일본기록에는 백촌강구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들의 공통점은 흰 백(白)이 들어가 있지만, 백강의 강은 강이 아니다. 다만 의미적으로 해석해보면 강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볼 수 있다. 또 이름에서 유래하는 백강이란 하얗다는 뜻인데 서해에는 하얗다는 의미를 가진 지역명은 없다. 

그래서 자료 내용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부안의 동진강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석문방조제가 막히기전 불과 10여년전만해도 장고항 일대에 가면 백사장이 있었고, 백토가 나왔었다. 그리고 기록에는 천척의 배가 일본에서 들어오고 당나라에서도 수많은 배가 왔다고 한다. 부안의 동진강으로는 지리적으로 봤을 때 그 많은 배가 들어올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당진 석문면 일대가 백강해전 전투가 벌어진 위치로 볼 수 있다.

●백강해전 희생자 위령 행사는 처음인가?

5년 전에 당진무속인연합회에서 위령제를 했었다. 그러나 반대하는 단체와 의견 충돌이 생기면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해 천부홍익정신문화대연합의 우룡스님이 위령제를 다시 열자고 먼저 제안했다. 이번 행사를 시작으로 역사적 고증이 더 필요하겠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한 화해의 장을 마련하는 기반이 되길 바라고 있다.

●행사를 통해 알리고 싶은 메시지는?

백강해전은 고대에 일어난 전투이지만, 이 전쟁을 시작으로 동북아시대에 미친 영향은 컸다고 보고 있다. 백강해전 이후로 한·중·일 3국은 오랫동안 치열한 갈등을 이어 오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위령제를 통해서 3국이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협력을 위해 함께 기원하고 상생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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