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하 교수의 문학산책

어미를 먹은 기억

                                                                             길상호(1973~ ) 
                 고구마에 싹이 돋았다 
                 물 한 방울 없는 자루 속 
                 썩은 내 풍기는 저 무덤 속에서 
                 새파랗게 싹은 
                 잘도 자랐다, 
                 탯줄을 자르기 전 
                 어미를 먹고 자라던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세상 모든 만물은 다 그 어미의 몸을 파먹고 자라는 것이다.
하루를 살다 죽는 하루사리로부터 천년을 살다가는 천년수(千年樹)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모두 제 어미의 몸속에 뿌리를 묻고 자라다 어느 순간 어미의 생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다.


길상호 시인은 고구마의 싹 속에서도 우주의 관계를 보고, 생명의 질서를 확인하고, 시간의 흐름을 살피고 있다.
고구마 싹이 자라며 고구마가 썩어가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선 체험을 깨닫는다. “썩은 내 풍기는” 고구마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이 시작되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렇듯 시인은 작은 사물을 통해서도 생의 비경(秘境)을 발견하는 자이다.
하찮은 사물 속에서도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대상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는 자이다.
뒹구는 낙엽 한 장, 산골 외진 곳에 누워 있는 바위 속에서 생의 무상이나 고독과 외로움의 의미를 동시에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무생물 속에서도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생명의 가치에 연민을 느끼는 마음, 의인화의 정신으로 대상을 보는 마음이 시정신이다. 그러한 마음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한없는 사랑을 껴안으려 노력하는 자가 바로 시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같이 생명의 존엄이 사라져 가고 사랑의 의미가 희박해져 가는 때에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조차도 서로 도구적 관계로 이해하려는 때에 우리는 조약돌 하나라도 생의 연민으로 바라보려는 인간사랑, 생명사랑, 자연사랑의 정신을 간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윤동주가 <서시>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 했던 바로 그 마음이다. 이슬 한 방울 속에서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풀잎 하나로 이 세상에 기둥을 세우려는 마음이 시인의 마음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치는 자연의 세계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보라. 염낭거미, 가시고기, 살모사 이것들은 모두 제 어미를 뜯어먹고 자란다 하지만, 우리도 그것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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