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읍, 석문면, 합덕읍, 신평면 등 4곳에서 집단학살사건 발생
석문면 통정리 노학산 희생사건, 합덕읍 신평면 희생사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당진신문=지나영 기자] 1950년 6월 25일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가슴 아픈 날이다. 이 현대사가 낳은 비극은 당진에도 남아 있다. 바로 당진읍, 석문면, 합덕읍, 신평면 등 총 4곳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사건이다.

당진읍에서는 1950년 8월 초순과 1950년 9월 27~28일에 읍내리 공동묘지와 시곡리 야산에서 희생사건이 발생했고, 석문면에서는 1950년 9월 28일 통정리 노학산에서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합덕읍에서는 1950년 9월 중순경 성동리 성동산 성동절터와 구양교에서 희생사건이, 신평면에서도 1950년 9월 중순경 거산리 야산에서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당진신문은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진실 규명과 치유에 다가가기 위해 [당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을 2회에 걸쳐 싣는다. (자료출처=신평면지 2017년 발행)

석문면 통정리 노학산 희생사건

1950년 9월 28일 밤 석문면 희생사건은 석문면 통정리 석문분주소와 양조장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의 두 손을 등 뒤로 하여 줄로 묶고 다시 일렬로 한 줄로 묶여 석문분주소와 양조장에서 약 1km정도 떨어진 노학산 방공호로 연행되어 그 곳에서 희생됐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1950년 9월 29일 오전 끝자락 방공호에서 흙으로 덮여 있는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사건발생 장소는 깊이 1m, 직경 50cm 정도의 교통호와 교통호 사이에 파여 있는 깊이 1m 50cm, 직경 1m 정도의 방공호였다. 시신을 수습할 당시 노학산 방공호와 그 부근에 약 29구의 시신이 있었고, 1950년 9월 28일 밤 노학산으로 연행되었던 희생자들이 약 15~20명이므로 노학산 방공호에서 약 20명이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희생자들은 총살되거나 구타와 죽창, 쇠창 등에 찔려 희생되었고, 이로 인해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은 심하게 부어있었다.

합덕읍, 신평면의 희생사건

합덕읍에서 발생한 사건은 총 2건으로 진실규명 대상자 장기영과 이은명이 희생되었다. 먼저, 1950년 9월 중순경 합덕읍 성동리 성동절터에서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거주하던 장기영이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다. 장기영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 주변에 약 15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는 진술로 미루어 성동산에서 일시에 여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판단된다. 

합덕읍에서 발생한 또 하나의 희생사건은 이은명이 구양교에서 희생된 사건이다. 이은명은 1950년 9월 20일 경 송악면 봉교리 자택에서 지방좌익에게 연행되어 당진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합덕읍 구양교로 끌려가 구양교 아래 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중순경 당진내무서에 감금되어 있던 사람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트럭에 태워져 구양교로 끌려와 수장되었는데 이은명도 구양교에서 같이 희생되었다는 참고인의 진술이 있다.

신평면에서 발생한 사건은 신평면 신송리에 거주하던 유문준이 거산리 야산에서 희생된 사건이다. 유문준은 자택에서 좌익세력에 의한 연행을 피하려 인근 논으로 피신했다가 이후 열흘이 지난 1950년 10월 2일경 신평면 거산리에 있는 야산에서 온 몸에 타박상을 입고, 혁대로 목이 매여진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유문준의 시신을 수습할 당시 사건발생 현장에는 유문준의 시신 외에 다른 시신은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자료사진.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가해주체 및 이유

신청인 및 참고인들은 희생사건에 인민군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공통된 진술을 하고 있어 당진군에서 발생한 희생사건은 인민군이 가해자로 참여하지 않았으리라 판단된다. 

당진읍 읍내리 공동묘지 사건, 당진읍 시곡리 야산사건, 석문면 통정리 노학산 사건, 합덕읍 장기영, 이은명 사건, 신평면 유문준 사건 등은 자택에 찾아온 지방좌익에 의해 당진내무서 혹은 각 읍. 면 분주소로 연행됐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지방좌익이 희생자들을 자택에서부터 감금장소까지 연행하거나 가해를 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희생사건에는 정치보위부원의 참여도 발견되는데, 이는 1950년 9월 27일 저녁부터 9월 28일 새벽까지 발생한 당진읍 읍내리 공동묘지 사건을 통해 확인된다. 공동묘지 사건의 희생자들은 모두 총살되었는데 당시 총기 지급이 제한적이었던 지방좌익과 달리 정치보위부원은 총을 휴대했으며, 희생장소에 미리 도열해 있던 사람들의 복장에서도 정치보위부원이 공동묘지 희생사건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진군에서 발생한 희생사건은 그들의 경제적 지위 및 우익활동 경력 등으로 인해 희생되었다. 희생자는 모두 남자였고, 나이는 20~50대였다. 구체적으로 20대가 7명, 30대가 10명, 40대가 7명, 50대가 1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석문면 거주자 중에는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어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 외에 공무원, 군인, 경찰 등이 있었는데, 공무원은 면서기가 2명, 전직 군인이 1명, 전, 현직 경찰이 2명이었고, 향토청년 방위대원과 소방대원도 있었다. 이외에 활동경력은 면장 및 이장, 대한청년단원 등이며, 진실규명 대상자 총 25명 중 9명이 면장 및 이장을 역임했고, 15명은 대한청년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진실규명 대상자들은 마을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에 속하는 지역 유지급 인사로 그들의 경제적 지위, 우익활동 경력 등으로 인해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진군내 자유수호활동과 신평면 희생자 

자유수호를 위해 당진에도 치안대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오늘날 송악면 광명리 나라사랑공원 위령탑 현지에서 매년 한국자유총연맹 당진군지부 주관으로 6.25전쟁을 비롯해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희생된 호국지사를 추모하고 애국정신을 기리는 자유수호희생자 합동위령제가 거행되고 있다.

이는 전국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공산주의에 항거하다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행사로 해마다 10월 30일을 전후해 전국 63개 지역에서 일제히 거행된다. 신평면 희생자는 매산리 박영옥, 김동환, 김지갑, 최정섭, 류창현, 류익수, 유문준이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