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미  시인, 수필가

이종미 (시인, 수필가)
이종미 (시인, 수필가)

[당진신문=이종미]

옹기를 처분해야겠다. 좀 더 쓰자고 맘먹으면 쓸 수는 있겠지만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것이 순리 아니던가. 

미세먼지 속에서도 한 장 한 장 여린 꽃잎 펼치던 영산홍 꽃이 빛을 잃고 떨어질 때. 피어 난지 겨우 하루밖에 되지 않은 무궁화 꽃이 ‘비들비들’ 마른 채로 나뒹굴 때. 차라리 아름다울 때 지는 것이 멋진 이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혈기왕성한 능소화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제 목을 비틀어 땅을 적실 때. 이별은 어떤 이유든 아쉬움과 망설임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인연이 다한 것은 이별을 해야만 한다. 이별 후의 일은 현재가 아닌 미래이기에 망설임이 없을 수 없다. 지는 꽃을 봐도 그렇고 헤어짐은 제아무리 치장을 해도 결코 아름다울 수도 없다. 하지만 시집가는 나는 엄마와의 이별이 그다지 아쉽거나 망설여지지 않았다.   

원앙금침 이부자리를 꿰맨 엄마가 다음으로 장만한 것이 옹기다. 장롱, 침대, 가전제품 등 필수적으로 장만해야 할 품목이 얼마나 많은데. 그 바쁜 중에 엄마는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옹기를 산다고 하루를 허비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엄마들은 딸이 시집간다고 하면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는데 울 엄마는 그렇지도 않았다. 시집가는 당사자인 나보다도 마음이 더 들떠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엄마 맘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아들 넷 장가만 들여 봤지 딸내미를 남의 집에 시집보내는 것은 처음이다. 엄마는 아들 혼사 때마다 사돈과 며느리가 혼수를 장만한다고 팔짱끼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이다. 나도 딸이 있으니 조금만 참자는 맘으로 버텼던 듯.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혼수가 아닌 옹기그릇은 지혜로운 친정엄마만이 해줄 수 있는 혼수라는 듯. 엄마는 알 수 없는 자부심으로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아니 이제 막 시작하는 막내딸과의 이별에 망설임은 찾을 수도 없이 기쁨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빠졌었던 것일까. 철이 없었던 것일까. 나도 그랬다.  
옹기집은 친정동리 인근에 있는 삼반네라는 마을에 있다. 그 마을은 흙도 담벼락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도 온통 다 황토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 몇 번 가봤다. 엄마는 밥을 짓기 전 무슨 행사라도 하듯 정성을 다해 재를 쳐냈다. 고무래를 이용하여 아궁이 끝에 있는 재까지 끌어내 삼태기에 담은 후 외양간 옆에 붙은 잿간으로 가서 어떤 날은 왼쪽이나 오른 쪽 푸대에, 어떤 날은 자루에 담으셨다. 다 커서 안 사실이지만 지푸라기, 솔잎, 나무 등 재료에 따라 태운 재를 분리했던 것이다. 어린 내 눈에는 주술사처럼 보였다. 

재를 담은 푸대와 자루가 여남은 개 넘으면 온 가족이 이고 지고 업어서 옹기집으로 향한다. 그것도 밝은 대낮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름 날 저녁밥을 먹은 후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을 즈음 나선다. 우리 가족만 가는 줄 알고 나서면 이상하게도 동네 사람들 거의 다 만난다. 아마 계절별로 해당 날을 잡아 마을 행사처럼 다녀왔던 모양이다. 재를 가져다 준 후 며칠 지나면 밤색과 검정색 계통의 흔해빠진 옹기와 신기하게도 흰색계통의 옹기를 가져오기 위해 동네사람들이 또 길을 나선다. 그 많은 재를 주었건만 옹기는 서너 개 밖에 되지 않는다. 예쁘고 신기하여 만져보고 싶지만 어린 아이들은 만져보기는커녕 근처도 갈 수 없다. 내 바로 위 오빠처럼 어린 남자애들은 옹기전에 단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어른들의 약속이었던 듯 싶다.    

이별을 앞 둔 옹기는 나와 함께 한 지 삼십년이나 되었다. 함께 살고 있는 남편보다 두 달 먼저 만났고, 큰딸보다 1년 이상 먼저 만났다. 새색시 되는 나보다 더 달뜬 엄마 얼굴이 오버랩 되는 애장품이다. 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쌓은 추억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차지한 물건이다. 앙증맞고 반들반들한 것이 꼭 나를 닮았다며 고추장과 된장 담은 한 쌍과 허드레로 쓰라며 사주신 것이 이 단지다. 애석하게도 고추장과 된장 단지는 나와 얼마 살지 못했다. 짓궂은 동네 꼬마 녀석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붉고 누르스름한 피를 쏟아내는 중상을 입고 명줄이 잘려버렸다. 

이름 없이 데려온 이 옹기는 친구들 다 떠났어도 허드레로 사용하라는 내 친정엄마의 당부를 잊지 않고 본업에 충실했다. 매실과 설탕을 넣어두면 매실액을 만들어 주었다. 풋고추나 마늘꽁다리를 넣고 간장, 설탕, 식초를 부어놓으면 맛난 장아찌를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누구의 힘 빌리지 않고 씻거나 뒤집어 말리는 등 내 혼자 힘으로 들마시를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여서 참 좋았다. 

이십대 후반 새색시가 오십대 중반을 맞이하자 옹기도 주름지고 갈라져 더 이상의 업무는 버거운지 퇴직을 소원했다. 별수 없이 명예퇴직을 시켜 베란다에서 화분을 받쳐주는 임무를 다시 부여했더니 아주 만족하였다. 내 시선이 머물 때는 실금간 사이에 이끼를 수놓아 위에 앉은 화분보다 앙증맞고 예쁘게 웃어줄 때도 있었다. 시부모님 모시고, 아이 낳고, 가끔은 부부 싸움하는 모습도 지켜봤을 옹기. 거칠고 뾰족한 나에게 ‘둥글둥글’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가르쳐 주고, 완벽을 추구하는 나에게 비어야 채울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 스승. 

세 번의 이삿짐에서도 다치지 않고 함께한 옹기를 이제는 처분해야겠다. 성장한 두 딸이 내 곁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듯. 그동안 살던 집을 줄였더니 베란다가 좁아졌다. 엄격히 따지자면 화분을 생각 못하고 거실과 방을 확장하였더니 베란다가 손바닥보다 좁아졌다. 화분을 줄여서라도 그를 지키려 애를 써봤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옹기를 둘만한 곳이 없지 않은가. 

헤어짐은 제아무리 치장을 해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세월을 충실히 살아온 옹기를 오늘은 기필코 버리기로 했다. 좁은 베란다에서 차이고 밀려다니는 옹기. 오늘도 망설이다 끝내는 버리지 못했다. 내일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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