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오피니언] 산불
[당진신문 오피니언] 산불
  • 당진신문
  • 승인 2020.01.04 06:00
  • 호수 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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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미 (시인, 수필가)
이종미 (시인, 수필가)
이종미 (시인, 수필가)

[당진신문=이종미]

마음을 누그러뜨릴 겸 들어앉아 책을 펼쳤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춥고 배고프니 짜증이 두 배로 올라온다. 여기를 벗어나는 순간 너희 둘은 아웃이야. 어디서 만나도 아는 체 하지 말자. 
마지막 남은 캠퍼스의 낭만과 멋을 반납한 대학교 4학년 시절. 취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꾀죄죄한 몰골로 자취방과 도서관을 오갈 때, 슬하에 아이 서넛 쯤 있음직한 사내가 쭈빗거리며 인사를 한다. 나는 기억 못하지만 혹시 저쪽은 나를 알까싶어 상냥하게 인사를 받았더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는 체 한다. 그를 따돌리기 위해 지름길을 포기하고 산 하나를 돌아 정문으로 다녔다. 하필 한창 데모가 심각할 때와 맞물려 몇 곱절 시간이 더 걸렸지만 귀찮은 존재를 따돌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 길을 선택한지 며칠 되던 날,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앞에 보이는 데모 군중만 의식하며 도서관으로 가다가 일이 생겼다. 날카로운 피리소리가 분간할 수 없는 공중을 가르더니 올려다 볼 틈도 주지 않고 퍽 소리를 냈다. 동시에 함께 가던 친구가 무릎을 구기며 쓰러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웅성대는 말소리를 종합하면 말로만 듣던 최루 오발탄이 우리들 머리 위에서 터졌나 보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금방 숨 넘어 가던 친구도 나도 생명에 지장 없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나는 전에 다녔던 지름길을 다시 택했고 그 길에서 작업남을 다시 만났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작업남 옆에는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친구가 하나 더 불었다는 점이다. 

작업남과 그 밥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질문한 후 정반대 방향의 자취집으로 이사를 해버렸다. 원수를 피하려면 외나무다리를 가지 말 것이며 작업남을 따돌리려면 자취집을 옮기지 말아야 할일이다. 이사 짐을 다 정리한 후 밖으로 나오는데 주인 집 마루에 있는 유선전화기 끝에 작업남이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잽싸게 방으로 다시 들어가 숨 고르다 밖의 동정이 궁금하여 빠꼼이 고개를 내미는 찰라 문 앞에 작업남의 얼굴이 둥실 떠있었다. 그는 뜻밖의 횡재라도 만난 듯 한달음에 뛰어들어 왔고, 그날부터 자취집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이게 되었다. 

작업남은 자취집 가족이 된 후 친오빠 코스프레 [cospre]까지 했다. 숨긴 칼보다 보이는 칼이 덜 무섭듯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싶어 오빠보다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달아 주었다. 그랬더니 그 나물에 그 밥을 포함 친구들 다섯 명을 더 소개시켜 주어 난 든든한 선배들을 등에 업고 도서관을 다녔고, 놀고먹던 그들은 내 덕에 도서관에서 함께 취업을 준비한 후 좋은 결실을 맺었다. 

나도 취업을 했다. 고생한 나를 위해 근사한 곳에서 모임을 갖는 단다. 작업남과 그 밥이 다짜고짜 시외버스정류장으로 불러냈다. 급하게 따라가니 다름 아닌 논산 탑정저수지가 목적지였다. 일행이 또 있었는지 다른 사람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며 둘은 낚싯대를 펼쳤다. 봄이라지만 음력으로는 아직도 정이월이라 무척이나 추웠다. 한 시간이 지나도 물고기도 온다는 친구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낚시와는 전혀 관련 없는 내가 여기 왜 있을까. 이 사람들은 나를 왜 불러냈으며 나는 왜 묻지도 않고 덜렁 따라왔을까. 슬슬 짜증과 피곤이 밀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강물을 에두르는 산비탈에 둥글게 파놓은 반공호가 보였다. 깊숙이 햇볕이 들고 입구에 낙엽이 알맞게 차 있어 따뜻해 뵈었다.

낚시에만 집중하던 작업남도 추웠나보다. 내 쪽을 흘깃 보다 말고 주변을 탐색하며 천천히 걸어온다. 손에는 담배 필 때 사용하던 라이터가 들려있다. 목표물은 반공호 낙엽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낙엽을 모아놓고 불을 댕기니 타는 향이 구수하다. 

봄볕에 불꽃은 보이지 않지만 낙엽이 거뭇해지는 것으로 보아 잘 붙었다고 느끼는 찰라 반공호 밖에 있던 억새풀이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주변도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옆에 있던 가방으로 내리쳤다. 이쯤 되면 죽었지 싶어 가방을 들으니 거뭇한 것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겁이 나서 겉옷을 벗어 덮어도 솔가지를 꺾어 내리쳐도 녀석은 거대한 도깨비로 변해 사방팔방 날뛰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단념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몇 백 명 되는 예비군이 나타나 눈 깜짝할 사이에 도깨비를 잡아 놓고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낚시 가방을 챙기며 ‘국가에서 제공하는 집에 살 뻔했는데 아쉽다’는 농담을 던졌지만 난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 둘로부터 어서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게다가 그들은 낚시가방이라도 걸쳐 변장이라도 가능하지만 겉옷과 가방이 불타버린 내 행색은 정신병원에서 방금 도망쳐 나온 몰골 그대로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또 흐트러진 머리에 화깃내는 얼마나 풍기는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위아래를 훑어본다. 그들과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 터미널에서 헤어졌다. 너희들을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힘주어 다짐하며 자리를 떴다. 

사람의 앞날은 그 누가 말하며, 헝클어진 인연의 실마리를 누가 알까. 작업남의 친구였던 ‘그 밥’이라는 총각이 4년이 지난 후 내 평생 배필이 되었다. 그와 난 조강지처, 조강지부라는 이름으로 28년 째 포기해 버린 산불을 아직도 태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