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성초등학교 ‘고 광 기’ 교장

▲ 아이들에게 언제나 할아버지와도 같은 고광기 교장선생님과 아이들
분주한 아침시간, 학교주변 도롯가에는 깜박깜박 녹색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로 늘 넘쳐난다. 그 뒤로 정장차림이지만 정확한 신분을 알 수 없는 어르신이 아이들 교통안전지도를 하고 있다.

알고 보니 그는 지난해 3월 계성초교 교장으로 부임한 고광기 교장선생님(59)으로 부임이래 지금껏 아이들 안전에 직접 나서고 있다.

▲ 아이들 걱정에 일일이 학교주변을 돌아보시며 교통안전지도를 하신다.
“차길은 있는데…어디로 다녀야 해요?”

차량증가와 운전자의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인식부족 등으로 어린이 안전을 안심할 수 없게 된 것도 벌써 오래된 일이다.
특히 계성초교 후문은 아이들이 다녀야 할 인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후문에서도 교통안전지도가 꼭 필요한 실정이다.


이에 학교장이라는 직함도 뒤로한 채, 아이들 안전에 적극 나서고 있는 고광기 교장선생님. 그는 계성초교 인근 주택가에 거주하면서 매일 아침 도보로 출·퇴근 하고 있는데 등·하굣길에 어김없이 이 곳에 들러 아이들 교통안전지도에 직접 나서고 있다.


그 곳이 기자와의 첫 대면 장소이기도 하다.
“사람의 습관이란 한번 길들게 되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 한 두번 길가에서 뛰는 아이들을 보며 계도하려던 마음이, 지금은 제 생활로 굳어 당연시 되었습니다. 특히 학교 후문쪽은 인도가 따로 없어 아이들이 다니기에는 무척 위험합니다.

더구나 도롯가에 주차한 차들로 정작 아이들이 다녀야 할 길이 없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학부형과 교직원들에게 백번 지시하고 보고받는 것 보다는, 제 눈과 몸으로 직접 아이들 안전지도를 함으로써 안심도 되고 해맑은 아이들 인사를 받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 좋은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니 얼마나 값진 하루가 되는지 모릅니다(웃음)”

교사는 학생에게 중요한 경험을 배운다

교장실에 들어서니 교장석 뒤편으로 자리잡고 있는 책장 안에는, 그의 긴 교직생활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진 앨범들로 가득했다.
올해로 38년째 교직생활을 해왔다며, 현재 학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내비치며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계성초교와는 인연이 아주 깊습니다. 71년도 교사 첫 발령지였지요. 초년생으로서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꿈을 펼쳐나갔던 곳입니다. 꼭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랄까요? 그렇듯 부푼 가슴을 달래며 설레임으로 첫 교단에 올라서던 날, 아이들을 가르칠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가정방문을 했었는데, 이런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정방문을 하는 중 점심때가 되었어도 학부형에게는 ‘먹었다’는 거짓말로 굶는 일이 많았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학생들의 가정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 추억들로 가득한 이곳이 저에게는 본가와도 같은 아주 의미있는 곳입니다”


▲ 교장선생님의 손길로 길러지고 있는 화초들은 아이들의 ‘좋은 학습자료’가 된다.
계성초교 교문 앞을 들어서면 유난히 화분이 많다.
구절초, 미모사, 벼 등 모두 그의 손길로 길러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학생들의 좋은 학습자료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발령받아 온 후로 화초를 조금씩 심은 것이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그 덕분에 학생들 학습자료로 활용할 수 있어 좋더군요. 저는 기계 다루는 것과 과학을 참 좋아했습니다. 육상도 좋아하여 학창시절 육상선수도 했었지요. 주로 과학과 산수를 가르쳤고, 아이들 성적이 오르기라도 하여 학부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교육자로써 보람되고 뿌듯했지요”


현재 교장의 자리에 있긴 하지만,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쳤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고광기 교장선생님. 그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식을 줄 몰랐다.


“초년 교사시절, 학생들에게 좀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그 당시 사회통념상 선생님은 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호랑이 선생님’이 될 수 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그런 저를 잘 따라주고 교사로서의 자질을 향상시켜준 중요한 역할자는 바로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런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제가 교사인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저의 무대가 아무리 화려하고 멋져도 관람객이 없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귀한 자리’를 마련해 준 ‘귀한 사람’

그는 고향인 당진에서 줄곧 교직생활을 해왔고, 앞으로도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여러 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의 졸업앨범과 학생들의 목소리가 담겨진 녹음테이프 등을 만지작 거리며 그 때를 회상했다.


“요즘엔 타임캡슐을 만들어 땅속에 묻기도 하지만, 그 때의 교육 분위기로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문득 생각하기로 아이들 목소리를 녹음해 두면 어떨까 해서 몇몇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말해보라 시키기도 했었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녹음해 두었습니다.

지금은 함께 늙어가는 처지일터인데 어디서 무엇을 할런지 궁금해집니다. 가끔씩 제자에게 연락이라도 오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제자들에게 그럽니다. ‘너희들이 찾기 쉽도록 내가 죽으면 꼭 당진에 묻힐 것‘이라고... 이 곳에서 태어났으니 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가 한 학교의 교장으로서 지금의 자리에 있기까지는 어머님의 영향이 컸다.
넉넉지 못한 형편임에도 교육에 대한 열의만큼은 그 누구보다 크셨고, 7남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다.
그 중 막내아들이었던 그에게 거는 기대는 더욱 남달랐던 것으로 보였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어 어머님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그럼에도 제가 농사짓는 것을 원치않으셨고, 교육자로 성공하길 바라셨습니다. 사실 저는 전기, 기계 다루는 것이 좋아 공과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님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님의 가르침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게 되어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고광기 교장선생님은 1971년 계성초교로 첫 발령을 받아 당진·송산·도성·합도초교를 거쳐 첫 발령지인 계성초교의 교장선생님이 되어 계신다.
그는 어머님의 훌륭하신 가르침으로 교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인생 최고의 보람이며 행복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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