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례(당진수필사무국장)

[당진신문=전명례]

이성은 이미 마비되었다. 체면 따위를 챙길 여지도 없었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허공을 쳐다보고 그냥 소리 지르며 울었다. 숱한 추락 앞에서 내성이 생길 법도 하건만 참을 수 없이 허망하여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늘에는 솜뭉치를 찢어 놓은 듯, 구름이 가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봄날이 싱그럽기만 했다. 해동된 땅이 부풀어 오르고 봄을 실어 오는 바람이 감미롭다. 농부의 마음이 분주해지는 계절이다. 겨울동안 시설물이 부서진 곳이 있나, 올해 작황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밭을 둘러보는데 인삼밭 두둑이 이상하다 싶었다. 고랑을 타고 들어가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버렸다. 여기 저기 밭이 뭉개지고 파헤쳐진 그 위에 어지럽게 낯선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입속이 가뭄의 점토처럼 바싹 말라서 굳어져 버렸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가까이에 계시던 할머니가 놀라서 다가오셨다. 무슨 일이냐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짓으로 밭을 가리켰다. 참혹한 현상을 바라보시던 그 분도 떨고 계셨다.

“어떤 놈 짓인지 참 못된 도둑이다. 혼자서 애면글면 가꾸는 인삼을 어디다 손을 대~ 쯧 쯧.”

안타까워하시며 할머니가 어깨를 쓸어주었지만, 내 울음은 설움까지 동반해서 더 커졌다.

삶과 가치의 중재자인 돈은 또 다른 이중적 자아를 지니고 있다. 도깨비 방망이가 지닌 이중성이다. 마신의 미끼이고 유혹의 대상이기도 하다. 남의 물건을 도둑질해서라도 살아야 했나 싶다. 그렇게 해서 과연 얼마만큼 잘 살 수 있을까. 도둑맞은 사람이 죄가 더 많다는 말이 실감되는 현상이 내게도 일어났다. 만나는 사람을 예사롭게 바라보질 못하고 ‘혹시나,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보게 되었다. 손실의 정도를 넘어 마음이 극도로 민감해지고 있는 자신을 휘어잡기가 더 어려웠다. 세상에 있는 모든 저주를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하여 다 퍼부었지만 분풀이는커녕 오히려 스스로가 더 비참해졌다.

자금資金의 흐름이 느린 인삼재배는 심어서 거두기까지 오 년에서 육 년 그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인내가 필요한 농업이다. 기다리는 동안의 자금난을 견뎌내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물며 도둑까지 들었으니 암벽을 기어오르는 듯 기진해서 그 져 망연할 뿐이었다.

남편을 다시는 올 수 없는 그 먼 곳으로 떠나보냈을 때 가까운 동기간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농사를 접으라고 했다. 여자의 몸으로 더구나 인삼 농사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무슨 오기였을까 싶다. 남편이 심어놓은 꿈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고집을 부리면서 여기 까지 왔다.

도둑이 잡혔다는 전갈을 들었을 때는 그 일이 있고 여러 날이 지난 후였다. 비슷한 피해를 입은 몇몇 사람과 도둑을 보러 갔을 때 너무 놀라웠다. 험상궂은 얼굴에 마귀를 닮은 모습을 생각하며 마주 봤던 도둑은 늙고 왜소했다. 털이 빠진 늙은 부엉이처럼 초라한 모습이었고 잔뜩 겁먹은 모습은 현상금까지 걸어놓고 잡으려 했던 도둑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도둑이 산다는 집에 가서는 더욱이나 놀라웠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농가주택 한 쪽에 창고 겸용으로 쓰고 있는 듯, 비닐하우스에 처분하고 남아있는 인삼이 잡다한 물건들로 덮여있었다. 남에게 뼈아픈 고통을 주면서 도둑질을 했으면 잘 살기라도 해야지 그 초라한 살림살이라니. 다 닳아빠진 부리를 하고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도둑질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그냥 늙음도 초라하고 궁상맞은데 하필이면 도둑질을 선택했다면 잡히지나 말 일이지. 나는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시간은 마법과 같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힘들던 그때라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세상 인간들의 고뇌는 아랑곳 않고 산과 들은 새로운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 낼 수 있다고 소리 내서 주문을 외워 본다. 열심히 마음을 다잡아 의지를 일깨우는 원심 돌리기를 연습하는 날들이다.
하늘은 쪽빛으로 청명하다. 어디서 불어오는 건들마인가 부드럽고 시원하다. 일하기에 알맞은 좋은 날씨다. 늙은 도둑은 그만 잊어버리자. 일하러 가자. 나는 할 수 있다. 고상한 늙음을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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