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미(시인, 수필가)

[당진신문=이종미]

벚꽃 길 따라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꽃만큼 곱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관심을 보이자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앞서가는 엄마를 부른다. 그깟 환경 스스로 이겨내라는 듯 엄마는 앞만 보고 걷는다. 엄마 품이 그리운 아이의 섦은 울음이 꽃대궁에 부딪혀 숭얼숭얼 꽃무리 진다. 어릴 적 내 모습이다.

5남 2녀 중 일곱째인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엄마의 젖을 찾았다. 된장을 바르면 행주로 닦아내고, 옥도정기를 바르면 마를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나이였지만 엄마 젖을 지켜야만 했다. 친구나 친척보기 창피한 줄 몰라 그런 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칠남매 막내로 태어나 부모 형제사랑 듬뿍 받아 아쉬움 없이 자란 것이 부족이었을 거라고들 한다. 엄마 따라 꽃놀이 나온 아이처럼.

내 어릴 적 우리 집은 웬만한 아동복지센터를 맞먹었다. 나의 친형제 칠남매, 집나간 큰어머니를 대신하여 내 엄마의 보살핌을 받고자 들어온 큰집 오빠 둘,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여 졸지에 가장이 된 고모를 대신하여 내 엄마의 품으로 파고 든 고종사촌 삼남 이녀, 우리 집에 아이들이 많아서 재미지다며 날마다 찾아오는, 한동네에 살던 큰고모네 막내딸. 총 열다섯 명의 형제가 엉켜서 살았다. 어릴 때는 누가 내 친형제인지 잘 모를 만큼 할머니와 엄마 아빠는 사랑을 나눠 주셨다. 사촌들에게는 그것이 공평일지는 몰라도 15명 중 막내인 나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큰 불공평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엄마는 새벽 먼동보다 먼저 일어나 가마솥에 밥을 지었다. 두레박 샘물을 길어 손빨래를 하셨고, 산더미 같이 다듬어 놓은 김치를 이틀이 멀다하고 담그셨다. 그뿐인가. 일손이 부족하면 논밭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서너 살 먹은 막내딸과 눈 맞춤도 어려운 지경인데 고만고만한 조카들에게까지 품을 내주셨다. 엄마는 언제나 내가 잠든 뒤에야 몸을 뉘이셨다. 잠결에도 엄마의 냄새를 맡고 품에 안겨 칭얼거리면 엄마도 눈물을 닦는 듯싶었다. 그런 후 눈물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배워서 엄마처럼 살지 말어.”

논농사가 주업이었던 우리 집은 양계장이나 특용작물 재배를 많이 하였다. 나와 열여섯 살 차이가 나는 큰오빠가 아마 스무 살을 넘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그랬던 듯싶다. 친구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배나무 과수원과 수박, 참외 농사를 지었다. 또 내 관심을 끌지 못하는 담배, 고추, 땅콩 농사도 지었다. 이 많은 농사를 지으려면 동네 일손 다 불러도 모자라서 지나가는 거지도, 아이 달린 과부도 한 달 이상 우리 집에 머물기도 했다. 너나없이 일손 부족한 그 때는 품삯보다는 품앗이를 선호하여 엄마의 품팔이는 필수였다. 사촌들에게 내 엄마의 품을 뺏긴 것도 마뜩찮은데 농사일마저 엄마의 품을 가로채는 장애물이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엄마가 어디서 일하는지를 분명히 알아두어야 비로소 등교를 했다. 하교 후 숙제를 다해놓고 엄마를 찾아 삼만 리라도 가야하므로 엄마의 거취를 알아두는 것은 필수였다. 사촌들이 업어주고 안아주고 놀아준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 큰애가 젖 먹으러 왔냐며 놀리는 어르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은근히 나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부터 웬만한 일꾼 한 몫 할 만큼 나는 못줄 잡는 것은 물론 잔심부름을 무척 잘했다. 하지만 농사일보다는 공부를 잘해야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한다는 점도 알 만큼 나는 영특했다.

시간은 나에게도 두 딸을 담을 수 있는 엄마의 품을 내주었다. 한풀이 하듯 내 아이들에게만 오롯한 품을 내주겠다는 각오와 함께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 두었다. 친정엄마는 만류했지만 전업주부였던 시어머니는 당연한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남편도 아이들도 몇 년 동안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일 것이다. 엄마는 왜 집에만 있는지를 물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자세히 물으니 친구엄마가 학교 선생님인데 정말 부럽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전업주부인 엄마 품이 좁아보였나 보다. 나에게서 전문 직업여성(career woman)의 품을 원했던 것이다. 내 꿈이 무엇이었던가. 친정엄마보다 큰 품은 아니더라도 내 아이를 위한 맞춤형 품을 갖는 것이 아니었던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자격증을 다시 갖추어 아이가 원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친정엄마도 내 자식만 보듬고 싶은 욕심이 컸을 것이다. 아니 확실히 있었다. 마지막 시간,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고 기다렸다가 막내딸이 당신 품에 안기자 눈을 감으셨던 분이 아니었던가. 아이를 낳아야 친정엄마를 이해한다고, 어린 막내딸이 잠든 뒤에야 몸을 뉘이셨던 엄마의 품은 그 얼마나 허전했을까. 
내 뜻대로 사는 사람 얼마나 될까. 오늘 밤 두 딸에게 물어야겠다. 이 엄마의 품은 넉넉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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