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당진신문=김문헌]

‘사회’(社會)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같은 무리끼리 모여 사는 집단” 혹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조직화된 집단이나 세계”를 일컫는다. 그런데 이것은 일반적인 개념일 뿐, 한자어 ‘사’(社)의 의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다르다. 그것은 사방 4km가 채 되지 않는 집단이나 25가구가 살고 있는 집단, ‘임의로’ 만든 5가구에서 10가구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집단, ‘자위’(自衛) 단체, ‘동지’로서 같이 일을 하는 단체 등을 뜻하는 소규모의 집단을 나타내는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자 문화권에서 말하는 사회라는 것이 현재와는 현저하게 다른 집단의 규모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같은’, ‘자의’, ‘임의’, ‘스스로’, ‘자발적으로’, ‘벗’ 등과 같은 속뜻을 담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사회란 강제성이나 구속성, 억압이나 폭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방대한 지리적 영토와 경계를 넘어서 지구화, 혹은 세계화를 부르짖는 마당에 이와 같은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일찌감치 흘러나온 신자유주의니 후기산업사회니 하는 말로 전세계가 하나의 큰 지구촌인 양 호도하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합리화에 학습된 사람들은 어불성설이라 몰아 부칠 것이다. 하지만 조직, 제도, 체제, 질서 운운하면서 방대한 국가나 정부를 통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나누면서 민중의 절대자유를 억압하는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자발적이거나 자의로 합의된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국가나 정부조차도 의사소통을 통한 합의의 조직체이고 이를 위해 임의로 편성된 관료들이 씨알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다. 그런데 국가는 그 본질적인 의미와 다르게 운영되고 있으며, 그 집단을 운영하는 정부 역시 그 정치체제 혹은 권력구조(권력분립)의 정치(철)학적 식견도 없이 자신들의 이권다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함석헌은 “혁명밖에 다른 길이 없다...혁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사회 제도를 근본적으로 전체로 고치는 일이다”라고 부르짖는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란 “최고선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잘 아는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와 국제법의 시조격인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국가를 “공동의 법률과 공동복지를 위해 결합한 조직체”라고 정의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보댕(Jean Bodin)은 국가를 “최고 권력과 이성을 지배하는 집단”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본질적 개념을 명확하게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과 정의가 무색할 정도로 최고선은 고사하고 법과 이성, 그리고 민중의 복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국가를 방만하게 운영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따라서 함석헌은 이러한 틀, 아마도 정치 체제적인 틀거지(frame)를 완전히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개조까지 바꾸자는 주장인 듯하다. 틀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틀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민중은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재현(再現)해야 하는가?

정치인은 민중을 대표해서 민중이 가진 권력을 대신 표상 혹은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그와 같이 정치인이 민중의 권력을 재현하는 대표성을 띠려면, 민중을 나라의 뿌리요, 씨알로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아예 추상같이 믿고 민중을 대우해야 한다. 민중을 앞에다 내세우는 의지, 민중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겸허함이 없다면 그런 정치인은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민중은 그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양도해서도 안 된다.

함석헌은 “민중은 뿌리요, 민중은 씨알이다. 정부, 관리, 모든 기관이 다 없어져도 살아 있는 민중만 있으면 나라는 또 된다”고 역설한다. 그가 말한 민중이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빛(영원한 진리 혹은 正道), 바람(말씀; 언론 혹은 사상), 밥(경제적인 활동). 이것이 잘 흘러가지 않으면 나무로서의 민중의 살림이 불편하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이 세 가지가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진리는 외면당하고, 언론은 중도(中道; 正道)를 지키지 못하며, 경제는 불평등하다. 이 때문에 모두가 피로감에 시달리면서 숨 막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함석헌에 따르면 혁명은 바로 이것을 고치자고 하는 것이다. 혁명은 마음 밭갈이, 특히 민중의 마음 밭을 갈아엎는 데서 출발한다.

“민중의 마음을 자주 갈고 깊이 가는 정치”, 그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 정치인뿐만 아니라 민중 자신에게 부여된 막중한 사명이다. 하지만 함석헌은 정치인에게 의탁하는 구태의연한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 스스로 하는 정치, 민중이 굳지 않고 질식하지 않고 썩지 않고 무지해지지 않고 가난해지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 그런 뒤집어엎음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고치되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어야 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정의와 참으로 돌아가는 그런 혁명을 구상해야 하고 기획해야 한다. 혁명(革命)은 명(命), 곧 하늘의 말씀, 진리를 받고 그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돌린다’, ‘고쳐 돌린다’, ‘돌아간다’는 뜻의 ‘revolution’은 다름 아닌 혁명이다.

씨알은 그 명을 새롭게 해야 한다. 자꾸 근본(arche)으로 돌아가려고 해야 한다. 정의와 진리, 그리고 참이 실현되는 바로 그곳을 바라보고 그곳을 지향하며 정치를 꿈꾸는 민중이 되어야 한다. 간디는 이를 간명하게 말했다. “혁명이란 맨 첨 원리(第一原理)에 돌아감이다.” 이제 혁명은 민중의 마음을 먼저 갈아엎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항상 시초가 되었던 그곳, 정치의 발원지가 되었던 처음으로 돌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 시초는 민중의 마음 밭이 아닐까? 그래서 그 혁명의 목적인 진정한 공동체적인 삶, 자유롭고 자발적인 집합체로서의 삶, 그러나 느슨해서 강제하지 않고 이성적인 법의 통용이 가능한 임의적인 작은 공동체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 사회를 바른 길에 올려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함석헌은 일침을 놓는다. 먼저 ‘민중 스스로 사람이 사람 노릇해야 한다.’ 그게 ‘중용’(中庸)이다. 가운데를 잡을 수 있고 가운데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민중은 절대로 위계적인 질서나 우열을 다투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되레 민중의 마음 밭은 늘 진리와 정의, 그리고 참을 지향하는 수평적 연대 [나란히 어깨동무]를 위한 관계망을 위한 공통의 자기 지배적인/근원적인 터라는 사실을 좀 더 엄밀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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