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오피니언] 착한 늙은이의 바람
[당진신문 오피니언] 착한 늙은이의 바람
  • 당진신문
  • 승인 2019.10.26 06:00
  • 호수 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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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샘 호천웅
솔샘 호천웅
솔샘 호천웅

[당진신문=호천웅]

내일 모레가 팔순인 늙은이가 시내버스에 올랐습니다. 거나한 모습입니다. 막걸리 한두 잔 걸친 듯합니다. 둘러보니 빈 좌석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자리에 건장한 덩치의 중년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단꿈이라도 꾸는 듯 아주 편해 보입니다. 잔뜩 취한 그는 긴 다리를 쭉 뻗어서 두 자리를 거의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남자 앞에 선 늙은이가 생각했습니다.

“저 친구 깨우면 앉을 수는 있겠지만 덕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자리가 편해 보이지도 않고...곧 빈자리가 나겠지” 

늙은이는 세 정거장을 서서 갔고, 새로 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 거렸습니다. “나 괜찮은 늙은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착하지 않은가?”

일주일 쯤 지나서 착한 늙은이가 친한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무개와 당신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갈 테니 거기서 만나서 저녁 같이하자!”

늙은이의 아내는 그 전화를 듣고는 동네 친구한테 전화해서 저녁 약속을 했습니다. 시계를 보며 착한 늙은이가 중얼 거렸습니다. “지금 나가면 많이 빠르지, 그래도 일찍 나가자, 나가서 사람 구경도 좀 하고...”

서둘러 샤워하고 옷 챙겨 입고, 나가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탔습니다. 얼마쯤 갔을까? 지하철역이 가까워 졌는데, 약속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못나가겠다. 다음에 만나자, 미안해”

급한 일이라는데 뭔 말을 할 것인가? “응 그래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야, 괜찮아”

이 늙은이는 거짓말 하면서 또 중얼거렸습니다. “약속을 깨는 데도 참고, 불평하지 않은 나는 괜찮은 늙은이가 맞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약속을 지키지 못할 테니 친구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중간에 버스를 내려 집으로 갈까? 했으나 아내도 없을 테고 내킨 김에 지하철역까지 갔습니다. 오가는 사람들, 벤치에 앉은 사람들, 허리 굽은 노파, 당당한 신사, 달콤한 연인들 각양의 사람들을 보며 각양의 생각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의자에 앉아 이 사람, 저 모습들을 구경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습니다. 뭘 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몇 차례 간적이 있는 식당 앞에서 메뉴판을 보니 지난 번 괜찮았던 요리 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그 동안 밥값도 모르고 살았으니 팔자 좋은 남자라는 생각을 하며 그 식당을 뒤로하고 자주 들르는 헌 책방에 갔습니다. 헌 책 하나 고르고 보니 진짜 배가 고파졌습니다.

잠시, 약속을 깬 친구를 향해 화가 나려고 했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집에서 혼자 밥 먹는 거야 이골이 났지만, 남들이 보는 밖에서 하는 혼밥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요. 마침 김밥집 간판이 보이기에 얼른 들어갔습니다. 서둘러서 한 줄 맛있게 먹고 집으로 가는 셔틀 버스를 탔습니다. 그 늙은이는 또 자기 칭찬의 환상에 빠졌습니다.

“남 탓하지 않으려는 당신 진짜 착한 늙은이여! 화내지 않고 참는 당신 멋진 영감이여!”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착한 늙은이는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못 지킨 친구는 시집간 딸네가 왔거나 아내가 보채서 그랬으려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깬 친구가 미안했다며 하는 말은 달랐습니다.

“그때 말이야, 아내가 갑자기 아프대서 병원에 갔었어. 그리고 암이래서 혼났어. 부랴부랴 수속하고 입원해서 수술까지 했어, 초기라서 다행이었고, 지금은 괜찮대”

순간 착한 늙은이는 멍해졌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식당가를 돌며 순간적으로 화가 났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화를 참았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중얼 거렸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화는 참고 이해하며 존중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다. 모두가 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일들은 큰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아주 힘든 일도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