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칼럼■

 세상을 살아가면서(살아오면서가 아니다. 인생은 떠나가는 것이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자살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 과연 있을까?
 자살을 생각하는 데에는 이런 저런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 다양한 이유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고, 어떠한 이유이건 문제는 다만 ‘생각만으로 그치느냐 결행을 하느냐’일 것이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이 결코 쉬울 수는 없다. 우리는 죽을힘이 있으면, 그런 과단성이 있다면 그 힘으로, 그 과단성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죽을힘을 사는 데 쏟는다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논리이다.
 자살(suicide)은 라틴어의 sui(자신을)와 cædo(죽이다)의 두 낱말에서 나온 합성어이다. 이는 개인이 자유의지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그 원인이 개인적이건 사회적이건 문제 삼지 않는다. 이는 단지 목숨을 끊는 순간의 물리력이나 작용이 당사자의 자유의지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고 있을 뿐, 원인제공이나 극한으로 몰아간 상황논리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자살긍정론자도 있다지만 수긍이 되지 않으니 부정적 의미를 찾아보자.
 종교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에서 자살은 신을 모독하고 부정하는 행위로 죄악시되고 있다. 가톨릭도 같은 시각이다. 신이 준 생명을 신이 거두어가기 전에 인간이 자의로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니, 신성불가침을 거스르는 중죄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열반사상의 입장에서 자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깝게는 효의 사상에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이거늘).
 자살이 동경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의 찬미’를 부르고 정사(情死)를 한 이도 있고 이를 미화하는 시각도 있지만, 또 연극이나 문예작품들에서 더러는 자살을 동정하고 미화하기도 하지만 아니다. 자살이 미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죄악에 다름 아니다. 혼자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관계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의로 천륜과 인륜을 끝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떠한 이유로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극한 상황이라면 이건 자살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이것은 타살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사약을 받는 자가 약사발을 스스로 들어 마셨다고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순장되는 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고 하여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법리를 따지자는 건 아니다.
자살자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결행의 순간까지 겪었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회한과 남겨지는 자에 대한 연민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가 그 얼마일 것인가.
 그렇게 극심한 고통을 치른 끝에 다다른 결론이 결국 죽음을 선택하고 생명을 끊는 일이라면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이유일 것이다. 궁극에 가서도 도저히 반전할 수 있는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좀 따뜻해져야 한다. 모든 자살자의 죽음에 대하여 공동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살을 막는데 힘을 보태야 한다. 자살도 사회병리현상이 빚어내는 한 형태라면, 그야말로 우리 중 누구도 그 공동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회병리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자살하려는 자에게 반전의 희망을 주지 못하는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떤 가벼운 행위가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갔을 미필적 고의의 공동정범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이 이는 사건이 있었다. 유명스타의 죽음이 그것인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사생활에서 겪은 몇 가지 불행한 사건들이 그를 여리게 만든 측면도 있었겠지만, 여러 정황과 사정들이 그가 홀로 견뎌내기에는 벅찼던 게 사실이었고, 우울과 불면이 수반된 외로움이 일조를 한 듯하다.
 이런 것들은 스스로가 감내해야할 자신의 몫이라고 하겠으나, 원인 제공이 된 일련의 사건은 우리사회의 병리현상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 사회의 지나치게 비뚤어진 관심의 대상이 되어 무차별 사이버 폭력에 고초를 겪고 있었지만 또 다른 편의 사회적 무관심은 그를 사고무친의 상태로 버려둠으로써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는 오뚝이 같은 삶을 참 치열하게 살고 갔다고 전해진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이나 사회장을 엄수하는 것만큼이나 국민적 관심과 애도를 받았다. 국민배우라는 칭송과 함께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그의 죽음의 파장은 과히 폭발적이었다.
 그의 죽음이후 벌써 몇 사람의 자살이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 베르테르효과는 경계되어야 한다. 죽음이 유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가치와 존엄을 지켜야 한다.
 사회적 관심과 국가적 조처로 더 이상 무고한 개인이 사이버 폭력에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함께 반성해 볼 일이다.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지만 맞는 개구리는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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