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일제가 이렇듯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던 이유는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운동이 충남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벌인 최초의 시위였기 때문이다. 충남에서 처음으로 터진 면천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주변지역의 학교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 시위가 배후가 없을 수가 없다고 보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일제 경찰의 탄압에 맞서 원용은은 모든 것은 ‘혼자 했다’고 하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면천 읍내 독립만세 시위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원용은은 면천 읍내에서 시위를 마치고 도망치듯 쫓겨 온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귀가하던 일부 학생들을 모아 몽산과 아미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조용한 산속에서 부르는 만세였지만 목청 것 소리쳐 만세를 부렀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주변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만나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원용은이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니고 만세를 불렀던지 그날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10일 면천읍내에서 전개되었다. 3월10일을 거사일로 정한 이유는 3월10일이 일제의 육군기념행사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념행사가 열리면 학생들이 동원되어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행사가 끝나고 나면 학생들은 일찍 귀가하게 되어 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되고, 이 점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이렇듯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기념행사에 동원되어 참석한 후 일찍 귀가하게 되었다. 원용은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미리 준비했던 대로 면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원용은과 함께 면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37명의 신입생들은 상급 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점차 인원이 줄었는데, 이들이 졸업할 때인 1919년 3월에는 11명만이 남아 졸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3.1혁명과 연관지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시대 상황이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된 초기였다고 해서 단순하게 원인을 알기 어렵다거나, 간단하게 일제에 의한 농촌 경제의 파탄에서 비롯된 경제적인 어려움이 반영된 결과였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 사람들에게 기미년은 벽두부터 기대에 부풀게 한 해였다. 멀리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는 소식과 함께, 몇 몇 약소국들이 독립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에까지 들려온 것이다.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쩌면 기미년에는 독립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나라를 빼앗긴지 꼭 10년째 되던 해였다.바닷길을 통해 경성을 드나들던 시대였기에 경성에서 3.1독립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은 당진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다. 이에 따라 당진면에서는 3월10일에 천도교가 앞장서 만세 시위를 준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신태순이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활동하면서 3.1혁명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확인할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석비에 기록된 비문에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분연히 광복운동에 헌신코자 상경하여 천도교 중앙총본부 서무위원으로 손병희 선생을 도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음우(陰佑 남 몰래 도움)하시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이 비문대로 신태순이 천도교 중앙총부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3.1혁명에서 활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3.1혁명에서 겉으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면 읍내리에서 준비된 3월10일, 3월16일 시위가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침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진출신 간부들의 역할과 관련해서이다.당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당진출신으로 김현구, 박용태, 신태순을 들 수 있다. 김현구와 박용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당진을 대표했던 접주였고, 당진에서 기포하여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내포지방 동학농민군과 함께 각종 전투를 지휘했던 인물이다. 김현구와 박용태는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이후 박인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은 동학농민혁명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내포지방을 휩쓸고 지날 때 당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진과 면천으로 나뉘어 있던 갑오년의 당진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회오리가 요동쳤다.이렇게 변화를 갈망했던 당진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빼앗기고, 좌절했을 것만 같았던 당진사람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반드시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겠다는 의지로 동학을 실천했던 당진사람들은 1919년 3월1일 전국으로 번져간 3.1독립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심훈이 안정옥과 결혼한 것은 그의 나이 30세이던 1930년 12월24일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을 하였지만 현실의 생활은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심훈은 본격적인 집필활동에 전념하여, 1930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한 『동방의 애인』을 비롯하여 1931년에는 『불사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하지만 심훈의 작품은 모두 일제의 검열에 걸려 더 이상 연재할 수 없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심훈의 작품은 수용할 수 없는 불량한 내용이었던 것이다.이 시기 심훈의 마음은 항일의식으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상해 망명 기간 중 사회주의에 접한 심대섭은 국내로 돌아 온 후 사회주의자 친구들과 가까이 하면서 활동하였다. 우선 1924년 사회주의 성향의 인물들인 박헌영, 임원근, 허정숙 등과 함께 ‘동아일보사’에 들어갔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박헌영은 심대섭과 경성고보 동기 동창이자 후일 조선공산당의 당수를 지낸 인물이다.임원근 역시 유명한 언론인이자 사회주의자로 허정숙과는 부부였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심대섭이 중국 망명 기간 중 함께했던 박헌영과 임원근은 단순한 친구를 넘어 함께 활동했던 동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일찍이 경성고보에서는 3.1혁명에 가담하였다 체포된 심대섭에 대해 “영리하나 경솔하여 모든 명령 등을 확실하게 실행하지 않는다. 게으른 편이어서 결석·지각 등이 많고 평소부터 훈계를 받아 온 자이다”라는 평을 일제 경찰에 제공한 바 있다.경성고보가 심대섭을 평가하였던 대로 3.1혁명에 참여한 것을 이유로 경성고보에서는 그를 퇴학시켰지만, 심대섭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는 것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평가한 것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심대섭이 망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고등보통학생이 심대섭의 경우처럼 일제 경찰에 잡혀와 당당한 태도로 진술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러한 심대섭이 당당하게 진술했다는 것은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조선총독부 판사 굴직희(堀直喜)는 심대섭에게 조롱하듯 조선인이 아무리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를 부르며 다닌다고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질문을 하였다.이에 대해 심대섭은 “만세를 부르는 것만으로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놓으면 언젠가는 독립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심대섭은 1919년 경성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아홉 살 나이에 3.1혁명을 맞았다. 당시 경성고보 학생들은 김백평, 박노영, 박쾌인 등이 주도하여 3.1혁명에 대거 참여하였다. 심대섭도 다른 경성고보 학생들과 함께 고종의 국장연습이 끝난 이후에 파고다 공원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파고다 공원에 모인 군중들은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이후 조선독립을 외치는 만세를 부르며 경성시내로 터져 나왔다. 심대섭도 군중들을 따라 경성시내로 나와 대한문·창덕궁 앞을 지나 안국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에서 가장 큰 문화축제는 가을에 열리는 상록문화제이다. 상록문화제는 저항시인이자 농촌계몽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상록수』를 지은 작가 심훈의 상록수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으로 1977년부터 시작하여 매년 이어오고 있는 문화제이다.그러나 막상 상록문화제의 주인공 심훈은 당진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당진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다. 인연이 있다고 한다면, 부친의 토지가 당진에 있어 심훈도 당진에 낙향하여 살았고, 소설 『상록수』가 당진 송악 일대를 배경으로 하여 지어졌다는 점이다.또한 『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강선필은 3.1혁명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가 출감하였다. 경성고보에서도 불령선인으로 퇴학당하였다. 이후 고향인 당진으로 낙향한 강선필은 동생인 강선국 등과 더불어 천도교 당진종리원에서 활동하였다.강선필이 천도교와 인연을 맺은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3.1혁명 당시 일제의 신문조서에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무종교라고 답하였다. 이를 그대로 믿는다면 강선필은 1920년대 이후에 천도교에 입도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쉽게 믿기 어렵다. 오히려 강선필의 고향인 순성면 성북리 유동 일대가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렇듯 강선필은 3.1혁명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격문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강선필이 이렇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강선필 스스로가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독립만세시위를 통해 독립선언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강선필과 박노영, 박수찬을 조사한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박노영과 박수찬은 강선필이 자금을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경성시내에 배포된 격문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격문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이 격문을 통해 독립만세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격문을 통해 독립운동 소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격문을 보고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유통되는 격문은 전국적으로 유포되어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입장에서는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는 행위를 가장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출판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한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경성에서 3.1만세 시위가 벌어졌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강선필은 1919년 3월7일 아버지와 함께 고향인 당진 순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경성에서 순성으로 귀향한 것은 강선필의 뜻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뜻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경성에서 유학 중이던 많은 학생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발적으로 귀향하였다.이렇게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은 학교가 휴교하였던 점도 있었지만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들의 뜻에 따랐던 점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은 경성에서 3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강선필(姜善弼)은 1896년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에서 태어났다.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 일대는 성북리 중에서도 유동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강선필의 본적지인 순성면 성북리 478번지는 순성에서 당진으로 향하는 성북리 도로변에 있는데 옛 유동초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아미 미술관이 들어서 있다. 순성면 성북리는 몽산성의 북쪽 뒤편을 뜻하는 지명으로 순 우리말로는 잣뒤라고도 불리는데 진주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이다. 강선필은 근대시기 면천에 공립보통학교가 생기면서 면천공립보통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면천에서 이사하여 경성으로 간 고희준은 그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3.1혁명은 그 영향이 너무도 강렬하여 수많은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길을 걷게 하였다. 고희준 역시 20대 초반에 맞이했던 3.1혁명을 통해 인생을 좌우할 만큼 큰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고희준이 출감 이후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표면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다. 고희준은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난 이후 결혼을 하였고, 1926년 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전차 운전원으로 취업하여 근무하였다. 경성전기주식회에